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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

[박상익]밀턴과 김교신

by 안티고네 2000. 3. 15.

밀턴과 김교신  

2000년 3월 15일 <다음칼럼>에 올렸던 글입니다.

 

 

존 밀턴(John Milton, 1608-74)은 문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거인이다. <아레오파기티카>는 비교적 짧은 산문이긴 하지만 밀턴의 산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글로 인정받는 글이다. 그만큼 밀턴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밀턴은 김교신(金敎臣)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김교신은 한 나라의 가장 귀한 산물은 그 나라의 지하자원이나 생산품이 아니라 그 나라가 배출한 인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김교신이야말로 한국 현대사가 배출한, 지극히 한국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밀턴 또한 17세기 잉글랜드가 배출한 참으로 영국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앵글로 색슨족이 세계 역사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을 딱 한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 역시 앵글로 색슨 족이었다. 자유주의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역시 영국인이다.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는 바로 이와 같은 영국적인 자유의 전통을 대단히 잘 보여주는 글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패트릭 헨리나 존 로크가 세속적의 의미에서의 자유를 주장한 반면, 밀턴은 종교적·신앙적 목적에서 자유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밀턴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심오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발견한 성경의 진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는 여건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여건이 곧 자유이다.

밀턴은 츠빙글리나 칼뱅에 의해 성경의 진리가 남김없이 다 드러났다고 보지 않았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특정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단번에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특정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교파 신학으로 고착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개혁의 완성을 지상 명제로 삼고 있던 밀턴이 카톨릭에 대해 철저히 반대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밀턴이 카톨릭을 반대한다고 할 때 그가 카톨릭의 범주에 넣은 대상이 말 그대로 로마 카톨릭 교회만을 의미했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밀턴은 카톨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국교회도 거부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이란 어중간한 것이어서 카톨릭의 의식은 그대로 둔 채 교황을 국왕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이란 바로 이러한 미적지근한 국교회의 종교적 상태를 개선하려던 사람들이다.

밀턴은 청교도 혁명 초기에는 국교회의 주교제를 규탄하는 입장에 섰다. 그 때 밀턴이 동지로서 손잡은 것이 바로 장로파였다. 그리고 밀턴과 장로파는 합력하여 주교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겼다. 장로파는 일단 혁명 1단계에서 성공을 거두자 거기에서 안주하려 했다. 더 이상의 종교개혁은 필요치 않다는 입장을 비치면서 장로교를 주교제를 대신할 또 하나의 국교로 만들려 했다. 장로파는 칼뱅에 의해 기독교의 진리는 다 드러났다고 보고, 칼뱅주의를 획일적이고도 일사불란한 교리로 고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들이 장로교를 국교로 만들 속셈으로 만든 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이다. 그리고 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제정한 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것은 바로 오늘날 장로교의 토대가 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가 칼뱅주의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 바로 검열제였다. 그것은 이를테면 양쪽에 날이 달린 칼과 같은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주교제 지지자들로부터의 반대를 막아내는 구실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계속적인 진전을 요구한 독립파로부터의 도전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는 바로 이 검열제를 반대하기 위해 쓰여졌다. 검열제란 본질적으로 표현 자유에 대한 속박이다.

밀턴은 그러한 속박의 기원을 카톨릭 국가의 종교재판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보았다. 카톨릭이란 근본적으로 획일주의와 전제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톨릭 국가의 비참한 상태를 설명하면서 밀턴은 그 단적인 예로써 갈릴레오를 들었다. 실제로 밀턴은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유럽 여행을 다니다가 갈릴레오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러한 카톨릭의 전제적 속성을 잉글랜드에 도입한 것이 바로 잉글랜드 국교회의 주교들이었다. 밀턴은 주교들에 의해 처음으로 잉글랜드에 검열제가 도입되었다고 보았다. 그러한 자유에 대한 억압은 잉글랜드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잉글랜드에는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제 주교제가 폐지되고 국교회가 무너진 마당에 청교도 혁명의 주체 세력이라 자임하던 장로파가 검열제라고 하는 고약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므로 밀턴은 장로파가 주교들보다 더욱 고약한 자들이라고 보았다. 장로파는 교파 신학의 색안경을 끼고,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에서 한 치만 벗어나도 이를 정죄할 구실을 찾는 편협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밀턴이 볼 때 장로파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방해하는 그리고 잉글랜드의 자유의 전통과도 거리가 먼, 카톨릭과 노선을 같이하는 수상쩍은 집단이었다.

그러므로 <아레오파기티카>는 그 작성 목적이 검열제를 반대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검열제의 배후 세력인 장로파를 공격하는데 있었다.

밀턴에게 있어서 자유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근거였고, 자유가 없다면 진리의 진보도 기대할 수 없었다. 밀턴은 기독교 신앙의 초점을 자유에 맞추는 가운데, 지극히 영국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표현했다. 이런 의미에서 밀턴은 대단히 영국적인 인물이다.

또한 밀턴은 기독교 진리의 새로운 발견에 의해 종교개혁 작업을 완수해야만 잉글랜드 국민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민족적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밀턴은 잉글랜드가 전 유럽을 지도할 위치에 있는 선민이라고 보았다.

나는 밀턴을 읽으면서 밀턴의 입장이, 한반도를 “동양 정국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던 김교신의 입장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신앙인은 또한 위대한 애국자라고 하는 사실을 밀턴에게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김교신이나 밀턴 두 사람 모두 진리 위에 조국을 세우려 한 인물들이었다. 두 인물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애국이란 정치꾼들의 더러운 입술에 매달려 조롱당하는 요즘의 애국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