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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

[박상익]밀턴의 실명

by 안티고네 2000. 4. 15.
LONG

4. 시력상실과 성격변화  

낭종에 의한 시신경교차 압박 가설

밀턴의 실명 원인에 대해서는 유전성 매독 가설 이외에도, 선천성 색소결핍증(congenital albinism), 망막박리(detachment of the retina), 선천성 안진증(congenital nystagmus), 선천성 백내장(congenital cataract), 난시(astigmatism), 선천성 망막 색소변성증(congenital retinitis pigmentosa), 시신경 마비(paralysis of the optic nerve) 등 다양한 소견들이 제시되어 왔다.

금세기 중반에 제기된 유력한 가설로서, 캔자스 대학교 의과대학의 내과 교수인 램버트 로저스(Rambert Rogers)가 주장한, 시신경교차상 낭포성 종양(suprachiasmal cystic tumour) 가설을 들 수 있다. 그는 1949년에 작성한 논문에서 밀턴의 증상을 자신이 진료한 환자의 임상 사례와 비교 검토하고자 했다.

그는 밀턴이 안상 낭종(鞍上 囊腫, suprasellar cyst)에 의해 초래된 시신경교차 압박(chiasmal pressure)의 증세를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밀턴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과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밀턴이 1654년에 필라라스에게 보낸 편지를 분석하여 밀턴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시각의 범위와 시각 손상의 기간에 관한 것이다. 그는 필라라스가 밀턴에게 보낸 편지 중 "왼쪽 눈의 왼쪽 부분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으며(나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난 몇 해 후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 방향의 물체를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밀턴이 만성적으로 관자놀이 쪽 반맹(temporal hemianopsia)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한다.

둘째, 밀턴의 눈에는 외견상 아무런 손상도 없었다. 밀턴이 “소네트 22”(Sonnet XXII)에서 쓴 것처럼, “이 눈들은 흠이나 결점 없이 깨끗했다.” 이점은 앞서 인용한 <두 번째 변명>에서도 확인된다.

셋째,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동안 밀턴의 기질과 성격에는 변화가 생겼으며, 이로 인해 그는 시 쓰기를 중단했다. 그는 이 시기에 화를 잘 내는 성격이 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의 특징을 이루던 매혹적이고 위엄 있는 표현은 이 시기에 그가 작성한 팜플렛들에서 독설적인 표현으로 변화되었다.

<쾌활한 사람>(L"Allegro), <침울한 사람>(Ill Penseroso), <코머스>(Comus), <리시다스>(Lycidas) 등은 모두 시력을 잃기 시작하기 전에 쓰여진 것들이다. <실낙원>(Paradise Lost), <복락원>(Paradise Regained),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 등은 그의 완전 실명 이후에 쓰여진 것이다. 그가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8년 가량은 시작 활동 면에서 상대적으로 공백기였다. 그가 청교주의의 열정에 휩싸이고 국내 정치 문제에 휘말린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로저스는 이상과 같은 신체적 증상과 성격의 변화에 병리학적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신경교차(optic chiasm) 아래쪽과 앞쪽으로, 그리고 제3뇌실(the third ventricle)과 시상하부(hypothalamus) 상층(床層, floor)에서 위쪽과 뒤쪽으로 서서히 증대하는 압박, 이런 증상들은, 안구의 외형적 손상 없는, 점진적인 시력 상실 및 성격 변화를 말해준다.

더욱이 시력 손상은 관자놀이 쪽(temporal field)에서 먼저 분명히 나타났다. 로저스에 의하면, 밀턴이 말한 “왼쪽 눈 왼쪽 부분의 완전한 어둠”,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신경 위축(optic atrophy)에 기인한 것이다. 각 망막의 관자놀이 쪽 시신경섬유가 압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어 로저스는 직접 환자를 치료했던 임상 경험을 예로 들면서, 그 환자의 증상과 밀턴의 증상이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J. G.로 알려진 이 환자는 구두 제조공으로서, 36세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의 시력은 오른쪽 눈부터 저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의자에 앉아 구두를 고칠 때 시야 왼쪽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왼쪽 눈의 왼 편에 안개 같은 것이 끼기 시작하면서 왼쪽 눈의 시력을 점차 잃었다. 그러나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그는 마치 열린 문틈으로 보듯이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필라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밀턴 역시 좁은 틈으로 약간의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J. G.는 촛불이나 전등을 바라볼 때 불 주위에서 둥글고 흐릿한 빛(光輪)을 보았다. 밀턴 역시 촛불을 바라볼 때 촛불 둘레에서 둥근 무지개, 즉 홍륜(虹輪)을 보았다.

J. G.는 수시로 두통과 메스꺼움(nausea)을 느꼈지만, 실명이 더 진전되자 두통은 사라졌고, 양쪽 안와(眼窩, orbits) 뒤편에 지속적인 약한 통증이 남았다. 이 기간에 그는 화를 잘 내고, 불쾌한 느낌이었으며, 위에 통증을 느꼈고, 클로로다인, 산화마그네슘 등을 복용했다고 말했다.

로저스는, 필라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밀턴이 헛배부름과 압박감 등으로 장(腸)에 영향을 받았고, 눈에 고통을 느꼈다고 기록한 점을 주목한다. “먹장구름 같은 짙은 안개가 이마와 관자놀이 쪽에 머무는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수시로 나의 눈을 짓누르며 몽롱하게 했습니다.”

J. G.는 1933년 3월 22일 수술을 받았다. 시신경교차 부위(chiasmal region)는 왼쪽 전두골(left frontal)의 골소성 피부판(osteoplastic flap)을 통해 검진되었다. 뇌하수체 종양(parapituitary tumor)이 그의 병세의 원인으로 드러났다. 종양은 비둘기 알 크기 정도의 낭종(cyst)으로서, 콜레스테롤 결정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종양 제거 후 오른쪽 눈의 남은 시야의 범위가 다소 확대되었다. 왼쪽 눈은 실명된 채였다. 로저스는 논문을 작성하기 며칠 전에 J. G.를 만났다. 그를 수술한 지 16년이 지난 후였다. 그의 오른쪽 눈은 절반 가량의 시야가 그대로 남아있고, 왼쪽 눈은 실명된 채였다. 남은 시야 덕분에 그는 나다닐 수도 있고, 안경을 쓰고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로저스는 이 구두 제조공의 병력과 밀턴의 병력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로저스가 논문을 작성하기 16년 전, 구두 제조공은 아직 완전 실명이 되기 전에 수술을 받았다. 그 덕분에 그는 당시 한쪽 눈의 절반을 볼 수 있었고, 이로써 충분히 활동할 수 있었다. 로저스는 그가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밀턴이 그랬듯이 후반 생애를 어둠 속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두 사람은 동일한 장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로저스는 밀턴의 실명이 시신경교차상 낭포성 종양(suprachiasmal cystic tumour)에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이 병세가 진행되는 동안 밀턴은 통렬한 문장을 구사했지만, 종양이 죽었을 때 그의 공격적인 성향은 사라졌고, 뮤즈는 다시 밀턴에게 돌아와 <실락원>을 비롯한 주옥같은 문학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로저스 가설의 문제점

이상에서 제시된 로저스의 가설은 자신의 구체적인 임상 경험을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일견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J. G. 와 밀턴의 시력 손상 과정 및 위장 장애 증상 등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 즉 밀턴이 시력을 잃어 가는 동안 성격에 변화가 생겨 화를 더 잘 내게 되었다는 그의 논지에는 확고한 증거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밀턴이 혁명 초기 팜플렛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격렬한 언어를 구사한 것은, 주교제 지지자들의 오만한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채택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그는 <비평>(Animadversions, 1641) [서문](The Preface)에서, 자신이 과격한 언어를 사용한 이론적 근거를 분명히 밝혀 두고 있다.

밀턴은 웃음과 분노가 “인간 지성의 가장 이성적인 두 가지 기능”이라고 보았다. 웃음과 분노는 결코 기독교적인 온유함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온유해야 할 때가 있고, 냉혹한 비웃음을 던져야 할 때도 있다. 진리와 평화의 적인 홀(Hall) 주교 등이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능란하고 교활한 달변을 구사하는 상황에서, 크리스천은 마치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격렬한 언사를 퍼부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저스는 J. G.의 병세가 진행되는 동안 화를 잘 내고 불쾌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를 밀턴의 경우와 직접 연결짓고자 했지만, 밀턴의 분노가 수사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임을 감안할 때, 그의 논지는 현저하게 설득력이 떨어지고 만다.

5. 녹내장 가설  

녹내장 가설

밀턴의 실명 원인으로서 오늘날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또 하나의 가설은 녹내장 가설이다. 이 가설을 주장하는 최근의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윌리엄 헌터(William B. Hunter, Jr.)를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로저스가 종양에 의해 밀턴의 성격이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 반면, 녹내장 가설을 주장하는 헌터는 밀턴의 감정 상태가 녹내장 발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로저스는 신체가 정신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 반면, 헌터는 정신이 신체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다.

녹내장은 외상이나 약제의 부작용 등에 의한 속발성 녹내장(secondary glaucoma)과 다른 원인 질환 없이 나타나는 원발성 녹내장(primary glaucoma)으로 분류되는데, 대개의 경우 녹내장 하면 원발성 녹내장을 말한다.

원발성 녹내장은 안내액(眼內液)의  압력이 증가하면서 발생한다. 정상적인 눈의 경우 안내액은 안구 내에 들어오자마자 배출된다. 그러나 어느 곳에선가 흐름이 막히면 안내액의 압력은 증가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눈의 지각 능력을 파괴한다. 그 결과로 야기되는 실명은 영구적이다. 발작은 시간 간격을 두고 이따금 일어난다. 10년 동안이나 질병이 잠복하는 경우도 있다. 원발성 녹내장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두 유형 모두 눈의 긴장 상승을 가져오며, 두 유형 모두 실명으로 귀결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은 급성 녹내장(acute glaucoma) 또는 폐쇄각 녹내장(narrow-angle glaucoma)이다. 그것은 긴장 고조로 인한 우연적인 아급성 발작(subacute attacks)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홍륜과 시력의 감소이다. 발작 사이의 기간에는 정신적 긴장이 흔히 나타난다. 발작이 심하지 않을 때는 눈이 회복된다. 그러나 그 후에 나타나는 발작들은 항구적인 긴장 고조를 수반하거나, 또는 심한 발작이 시력을 상실케 만든다. 그것은 특히 불안정한 혈관운동신경계를 지닌, 흥분성 기질의 50대와 60대 여성에게 주로 발생한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원시(遠視)인 사람에게 발생한다.

두 번째 유형은 단성 녹내장(simple glaucoma) 또는 개방각 녹내장(wide-angle glaucoma)이다. 그것은 예계적(豫戒的)인 징후와 격심한 과정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기원이 잠행적이며 병세도 서서히 진행한다. 그것은 첫 번째 유형보다 10년 정도 늦게, 남녀 양성에 모두 발생하며, 어떤 특정한 심리 패턴을 지닌 사람에게만 발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타입의 눈에도, 어떤 굴절 이상의 경우에도 발생한다.

헌터는, 밀턴이 첫 번째 유형, 즉 정신적 불안에 관련된 아급성 발작 및 원시로 특징지어지는, 폐쇄각 녹내장을 앓았던 것으로 판단한다. 이 질환은 특히 과거에 눈에 문제가 있었거나, 가족 중 일부가 (밀턴의 모친처럼) 얼마간 시력 장애를 지니고 있는 경우에 발병하기 쉽다. 안과 의사와 정신과 의사들은 폐쇄각 녹내장에 걸리기 쉬운 성격 유형에 대해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유형에 대한 의견 일치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설명이 밀턴의 성격과 꼭 들어맞는다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마크 쇤버그(Mark Schoenberg)는 39세의 한 정비공장 주인의 임상 사례에 관해 보고했는데, 그의 발작은 각별히 사업으로 인한 근심 걱정 때문에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업을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자 그의 눈은 상태가 좋아졌다. 허버트 리플리(Herbert S. Repley) 또한 녹내장 환자가 산책 등의 신체 활동을 함으로써 증세가 호전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점은 밀턴의 경우와도 다르지 않다. 밀턴은 그의 눈병이 진행되면서 책을 읽으려 했을 때 눈이 아프다가도, “가벼운 운동을 하고 나면 다시 좋아졌다”고 기록했다.

18명의 환자를 직접 관찰한 리플리와 울프(Wolff)가 보고한 임상 기록에는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들의 관찰에 의하면, 모든 환자들은 오랜 동안 성격 적응상의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빈번한 징후는, 감정의 기복, 과도한 근심 걱정, 그리고 우울증 등이었다. 정신쇠약성 신경증(psychasthenic neurosis)은 그들에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심함, 꼼꼼함, 완벽주의 등은 일반적이었다. 더욱이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신체에 대한 집착, 그리고 용모와 의상에 대한 자부심이 현저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심장 앞부분 고통, 가슴 두근거림, 두통, 잦은 요의, 상복부 통증, 설사, 변비, 만성 피로 등 성격 반응에 연관되었음직한 증상들이 발견되었다. 환자들은 가족 관계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대체로 그들은 양친 중 하나 또는 모두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항상 불안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일생 성숙한 대인 관계를 발달시키는데 어려움을 겼었고, 특히 배우자 및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그러했다. 안정과 의존의 필요성은 결혼과 같은 중대 문제를 충동적으로 결정짓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결혼 생활에 대한 적응 정도가 높지 않았다. 끝으로 모든 환자들은 녹내장 증후가 시작할 무렵 주변의 절망적인 상황과 연관된, 걱정, 분노, 우울 등을 경험했다. 문제의 만족스러운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행동을 종종 감행했고, 그것은 일시적 만족을 주었지만, 때로 더 큰 좌절을 안겨 주었다. 한편 밀러(S. J. H. Miller)는 녹내장 환자 집단이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설정한, 근면하고 성실한 시민들”이라고 말한다.


밀턴의 성격

알려진 모든 증거들로 미루어, 밀턴은 이러한 성격 유형에 잘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분명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눈을 걱정했다. 그의 어머니는 눈에 이상이 있었으며, 30대 초부터 안경을 썼다. 밀턴이 성실하고 꼼꼼한 완벽주의자였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인쇄되는 과정을 꼼꼼하게 챙겼으며, 심지어 완전 실명 후에도 <실락원>의 정오표를 펴냈을 정도이다.

밀턴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철저히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는 일생 동안 결코 상황에 순응하거나 비굴하게 타협함이 없이 그 자신의 길을 걸었다. 밀턴은 그의 시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정신적인 독립성을 견지했고, 도덕적·지적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실정법 위배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각오로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를 검열도 받지 않은 채 출간했다. 그는 때로 압도적인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사제들, 이혼법, 검열제를 공격했다. 그는 찰스 2세가 왕좌에 다시 오르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공화국을 제안할 정도로 신념에 철저했다. 그는 완벽한 삶을 위해 정직하게 노력했으며,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자전적인 글들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용모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게 눈길을 돌린 사람 누구에게라도 추악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눈은 "상해를 입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며, “아무런 혼탁 없이, 맑고 명료”했다. 밀턴은 “오직 이점에서만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남을 속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핏기 없는 것이기는커녕, 창백함과는 정반대의 색조를 띄고 있어서, 내 나이를 실제보다 10년 정도 어리게 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할 정도로 용모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눈병 발작 시기에 두통과 상복부 통증에 시달렸다. 또한 그는 1643년 6월에 메리 파월(Mary Powell)을 처음 만났고,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7월초에 충동적인 결혼을 했으며, 그 후 이혼 직전의 사태에 이르는 심각한 가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왼쪽 눈의 시력을 잃기 시작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녹내장 환자의 일반적인 특징 중 밀턴에게 해당되지 않는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밀턴이 우울증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1644년에 있었던 일

밀턴은 1654년 9월 28일 친구 필라라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시력 약화를 자각하게 된 것이 10년쯤 전이라고 기억했다. 그렇다면 1644년에 그의 생애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만일 그의 실명 원인이 정서적 불안에 의해 촉발된 녹내장이라면, 이 시점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1644년 늦여름, 밀턴의 나이 거의 36세 되었을 때, 그는 아마도 <아레오파기티카>를 집필하고 있었을 것이고(11월 23일 출간), 이혼 팜플렛인 <사현금>(Tetrachordon, 1645년 3월 출간) 집필 작업이 일부 행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해 2월에 <이혼론>(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의 2판이 출간되었고, 6월 5일에는 <교육론>(On Education)이, 8월 6일에는 <마틴 부처의 이혼관>(The Judgement of Martin Bucer)이 출간된 바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에는 밀턴을 유별나게 흥분시킬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1644년 8월 13일에 밀턴의 감정을 크게 동요시킬만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즉 바로 그 날 밀턴의 이혼 관련 팜플렛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공격이 가해진 것이다. 허버트 파머(Herbert Palmer)는 의회 설교를 통해 밀턴의 이혼 관련 팜플렛들을 비난했다.

“만일 어느 누가 양심을 빌미로 ……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언급한 것 이외의 사유로 말미암아 이혼을 주장한다면 (그에 관한 사악한 책이 널리 유포되어 있는데, 그 책은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그 책의 저자는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이름을 명시하여 바로 여러분에게 헌정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모든 자들에게 관용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이혼론>(초판)은 1년 전인 1643년 8월 1일에 간행되기는 했지만, 파머의 비난은 밀턴에게 가해진 최초의 공개적인 공격이었다. 그것이 밀턴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가 하는 것은 이듬해 3월에 출간된 <사현금>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무분별한 청교도 파머는 “그 책을 거의 읽어보지도 않고 저자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 목자다운 또는 형제다운 설득력에 의해 의논하거나 권고하거나 처리하지도 않으면서, 가장 공개적이고 독설적으로 그리고 가장 악랄한 기회를 포착해, 저자를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나빴던 것은, 설교가 의회에서 행해졌고, 의회는 그 설교 내용에 찬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격은 밀턴이 평소 자신과 동일시했던 집단으로부터 가해졌다는 점에서,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혁명 초기에 쓴 반성직적 팜플렛들로 인해 혹평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이상주의자는 자신을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순진한 믿음이긴 하지만―하고 있던 집단으로부터 버림받고 공격을 받은 셈이다.

이혼 팜플렛들의 독자 반응에 대한 밀턴의 소견을 담은 시 “장기 의회에서 새로운 양심의 강요자”(On the New Forcers of Conscience under the Long Parliament)에는, 그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밀턴은 “‘새로운 장로’는 ‘옛 사제’보다 한술 더 뜨는 자들”(New Presbyter is but Old Priest writ large)이라는 저 유명한 독설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 경험을 겪은 후 그는 장로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꿔, 독립파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환멸의 경험은 분명 그에게 정신적 충격―그 충격은 1644년 말에서 1645년 초까지 계속되었다―을 주었으며, 그것은 가뜩이나 눈이 좋지 않았던 밀턴에게 녹내장 발작의 계기를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일단 녹내장으로 한쪽 눈이 실명된 사람은 나중에 다른 눈에도 실명이 오기 쉬우며, 이 경우 정서적 불안은 하나의 촉진 요인이 된다. 쇤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심리요법은 (발작이 초래한 급격한 시력 악화 때문에) 급성 녹내장 환자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일단 급성 발작의 위기가 해소된 다음에도 환자의 정신적 어려움에 대한 조사가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환자의 다른 눈이 녹내장의 초기 단계에 와있을 수 있으며, 심리적 혼란은 언젠가 안압 상승의 위기를 촉발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 실명의 원인

프렌치(J. Milton French)는 밀턴의 완전 실명을 1652년 2월말경이라고 추정한다. 밀턴의 완전 실명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답은 밀턴 자신의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를 담당한 의사는 만일 그가 살마시우스에 대한 답변서를 계속 집필할 경우 나머지 시력마저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명> 집필에 따른 과중한 스트레스가 그의 시력 손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의사의 실명 경고가 밀턴에게 심각한 정서적 불안을 주었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밀턴은 이미 1647년부터 자신이 시력을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전망 때문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헌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의사들의 경고가 가뜩이나 녹내장을 걱정하고 있던 환자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어 그의 궁극적인 실명을 촉발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의사가 오히려 밀턴의 병세 악화를 부추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밀턴의 경우에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추론이다.


6. 심인성 상흔  

밀턴은 원시(遠視)였는가?

실명하기 직전인 1651년까지도 밀턴은 치료를 위해 꾸준히 약을 복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을까 하여, 의사를 시켜 다량의 피를 쏟도록 하기도 했다. 그가 돌팔이 의사한테 속아넘어가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현대 의학의 입장에서는 야만적인 것으로 비쳐지겠지만, 1651년의 의학 수준으로서는 그것이 표준적인 처방이었던 것이다. 현대 의학이 밀턴의 병세를 진단하는데는 이렇듯 3세기라는 역사적 거리가 커다란 장애물로 떠오른다.

밀턴 시대에 사용된 의학 술어에서도 이런 문제는 나타난다. 밀턴에 관한 초기 기록들에는 밀턴과 그의 모친이 모두 “약한 눈(weak eyes)”을 가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과학적으로 결코 엄밀하다고 할 수 없는 이 말은, 오늘날에는 대부분 근시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이 17세기에도 마찬가지였는지는 의문이다. 헌터는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즉 밀턴이 근시가 아닌 원시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급성 녹내장 환자들은 원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다수의 밀턴 연구자들은 밀턴이 어린 시절부터 근시 증세를 보였으며, 그의 모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오브리는 밀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의 어머니는 눈이 매우 약해서 30세가 지난 후부터 안경을 썼다.”

그렇다면 그녀는 먼 곳을 보기 위해 안경을 썼는가, 아니면 바느질할 때처럼 가까운 것을 보기 위해 안경을 썼는가?

헌터는 원시―그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심해진다―인 30세의 여성이라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그녀의 아들 역시 “선천적인 약한 시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생 시절  대단히 많은 책을 읽었고, 그는 이 시기에 “빈번한 두통”을 겪었다. (밀턴은 일생을 통해 시력 교정 없이 책을 읽었다.)

밀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칼을 뽑아 휘두를 줄을 알았으며, 날마다 그 사용법을 익히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일단 칼을 차기만 하면, 아무리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 해도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근시를 교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밀턴이 그런 연습을 했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원시인 경우라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원시는 오히려 독서에 어려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밀턴의 두통은 책을 읽는데 눈을 맞추느라 긴장 때문에 초래된 것일지도 모르며, 그의 눈은 근시가 아닌 원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가지, 밀턴의 초상화들 가운데 안경을 쓰거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이다. 원시와는 달리, 근시의 경우에는 평상시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상의 여러 정황들을 고려하면, 밀턴의 시력이 원시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밀턴이 원시였다면 녹내장 가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밀턴의 실명(失明)은 심인성상흔(心因性傷痕)

그러나 밀턴의 실명에 대한 어떤 진단도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로저스가 지적했듯이, 헬름홀츠(Helmholtz)가 검안경(ophthalmoscope)을 발명한 것은 1851년이었고, 검안경이 없다면 밀턴에 관해 알려져 있는 자료만으로 그의 증세에 대한 확실한 진단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헌터 역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어떤 사례 연구도 실물로 조사하는 것만큼 충분할 수는 없으며, 3세기의 시간이 흐른 후 결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증거가 부분적인 데다가, 부정확하게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밀턴의 실명 원인에 관한 모든 가설들은 잠정적인 수준을 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는 시신경교차상 낭포성 종양(suprachiasmal cystic tumour) 가설과 녹내장 가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두 가설의 차이점은, 전자가 신체적 요인이 심리적으로 미친 영향을 강조한 반면, 후자는 성격적 요인이 발작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는데 있다.

필자의 입장은 후자, 즉 녹내장 가설로 기운다. 신체적 원인이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는 로저스의 가설보다는, 그 반대로 밀턴의 성격과 기질에 녹내장의 급성 발작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있었다고 보는 녹내장 가설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밀턴의 전기 작가인 파커는 밀턴을 “지극히 잘 준비된”(extraordinarily prepared)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동시대인들의 야유와 조롱, 억압적인 부당한 처사, 오만에 찬 모독적 언사, 심지어 불행한 결혼 생활의 아픔에 이르기까지, 육신에 가해지는 어떤 고통 이상으로 커다란 아픔을 주었던 모든 시련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단호한 신앙과 의지로써 인내했을 뿐만 아니라, 초월하고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던 중,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밀턴의 실명은 1644-1652년의 고투와 그에 따른 극심한 정서적 불안이 그의 육체에 남긴 심인성 상흔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ARTICLE
밀턴의 실명  

<밀턴연구> 제9집 2호(1999년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

 

 

1. 실명(失明) 원인 규명의 어려움

1650년 1월 8일, 잉글랜드 공화국 국무회의(Council of State)는 외국어 비서관(Secretary of Foreign Tongues)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에게 명령을 내렸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프랑스의 탁월한 논객 클라우디우스 살마시우스(Claudius Salmasius, 1588-1653)가 얼마 전 출간한 <찰스 1세를 위한 변명>(A Royal Defense of Charles I, 1649)에 대한 반박문을 집필하라는 것이었다.

밀턴의 집필 작업은 그 해가 저물기 전에 끝났으며, 이듬해인 1651년 2월 24일에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명>(A Defense of The English People)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잉글랜드 공화국 정부의 찰스 1세 처형을 비난한 살마시우스의 주장에 맞서, 전 유럽을 상대로 잉글랜드 국민의 무고함을 밝힌 이 글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파리(Paris)와 툴루즈(Toulouse)에서는  밀턴의 글이 공개적으로 불에 태워지고 판매가 엄격하게 금지되었지만, 잉글랜드 공화국을 지지한 국내외 인사들은 밀턴의 논지에 찬사를 베풀었다.

그의 글은 전 유럽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라틴어로 작성되었고, 이 글이 출간된 후 밀턴은 잉글랜드 공화국의 옹호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처음 밀턴이 이 임무를 떠맡으려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만류했다. 그들이 살마시우스의 학문적 권위에 주눅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행여 밀턴의 답변이 적절치 못한 것이 되거나, 그로 인해 조국의 대의가 손상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밀턴은 이러한 모든 우려를 비겁한 소치로 간주하거나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시샘 정도로 간주했다.

만류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밀턴은 이미 1644년경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그 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국무회의로부터 반박문을 집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남은 오른쪽 눈마저 매우 나쁜 상태에 있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마저 악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밀턴이 그 임무를 맡을 경우 남은 눈의 시력마저 완전히 잃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는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명>이 출간된 지 만 1년 후인 1652년 2월에 완전 실명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밀턴의 실명은 악성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것에 견줄 정도로 가혹한 시련이었다. 음악가에게 청력이 중요한 것이라면, 글을 읽고 쓰는 학자에게 시력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생애의 대부분을 글읽기에 할애했던 학자에게 독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밀턴은 완전 실명 한 후, 적들로부터 그가 장님이 된 것은 신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공공연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체적인 장애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거늘, 하물며 밀턴처럼 자부심 강한 인물에게, 적들의 비난은 실로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완전 실명"은 그의 "이혼 문제" 및 "왕정 복고"와 더불어 밀턴 생애의 3대 위기로 꼽히고 있다.

실명 이후에 밀턴이 쓴 거의 모든 글에는 어느 정도 실명의 영향이 배어들어 있으며, 실명이 그의 삶과 사상과 문학에 미친 영향은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 1671) 같은 작품들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밀턴의 실명 원인을 알아보는데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에서 이 글은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첫째, 필자는 안과 전문의가 아니므로, 밀턴의 병세에 대한 독자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둘째, 설령 안과 전문의라 할지라도, 3세기 전에 살다 간 인물의 질병에 대해 확정적인 결론을 도출해내기란 불가능하다. 밀턴이 자신의 병력에 대한 자전적(自傳的)인 기록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가 사용한 어휘들이 현대 의학과는 거리가 먼 비과학적 표현이어서 정확한 증상을 알아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에서 기존의 연구 동향을 검토하여, 현대 의학이 밀턴의 실명 원인을 무엇으로 추정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잠정적이나마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호사가적인 한담(閑談)에 그치리라고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그의 병세가 진행된 8년 간(1644-1652) 잉글랜드의 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이 기간에 밀턴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소용돌이치는 정국의 한복판에 있었다. 바꾸어 말해서, 그의 실명 과정은 그 시대의 정치적·종교적 사건들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실명 원인 및 과정에 대한 고찰은 그의 생애는 물론 그의 시대에 대해서도 상당한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 어린 시절의 독서  

불행한 운명, 의연한 자세

밀턴은 자신의 실명 원인이 어린 시절의 독서 탓이라고 설명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린 소년일 때부터 문학 공부를 시키려고 작정하셨다. 문학 공부에 남다른 흥미를 갖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12살 이후로는 자정(the hour of midnight)이 되기 전에 공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적이 거의 없었다. 나의 눈이 손상된 첫 번째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나의 눈은 선천적으로 약했고(natural weakness), 이 때문에 종종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 중 어느 것도 나의 향학열을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내가 날마다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또 집에 돌아와서도 다른 교사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밀턴은 자신의 실명을 향학열에 기인한 과도한 독서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의 적들은 그가 추구했던 종교적·정치적 노선이 사악했기 때문에 신이 징벌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밀턴이 말한 대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눈이 좋지 않았고 과도한 독서로 인해 눈이 손상된 것이라면, 밀턴의 실명을 그의 사악한 생애 때문이라고 매도한 적들의 주장은 근거가 사라지고 만다. 여하튼 밀턴은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여겼는지, 그밖에도 많은 자전적인 기록들을 남겼다.

밀턴의 실명에 관한 가장 객관적이고 자세한 설명은, 1654년 9월 28일에 당시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아테네인 친구 레오나드 필라라스(Leonard Philaras)에게 쓴 편지이다. 밀턴이 완전 실명된 지 2년 7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레오나드는 그의 병세를 파리의 저명한 안과 의사 테브노(Dr. Th venot)에게 보이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 편지에서 그는 질병의 경과와 증세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나의 시력이 약해지고 둔감하게 된 것을 알게된 것은 10년쯤 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 나는 배에 가스가 차면서 신장과 장의 통증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평소의 습관대로 책을 읽으려면 눈이 지독하게 아팠으나, 가벼운 운동을 하고 나면 다시 좋아졌습니다.
촛불을 쳐다보면 마치 무지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왼쪽 눈의 왼쪽 부분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으며(나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난 몇 해 후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 방향의 물체를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른쪽 눈의 시력은 3년쯤 전에 서서히 그리고 현저하게 없어졌습니다.
시력이 완전히 없어지기 몇 달 전에는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있어도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먹장구름 같은 짙은 안개가 이마와 관자놀이 쪽에 머무는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수시로 나의 눈을 짓누르며 몽롱하게 했고, 특히 오후부터 저녁까지 그런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직 시력이 좀 남아 있을 때,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노라면 눈꺼풀 속에서 수없이 많은 빛이 솟아 나오곤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 시력이 날마다 점점 나빠지면서, 한층 어두운 색깔들이, 안쪽에서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한 또는 회색 빛을 띤 암흑이, 그리고 회색 줄무늬가 섞인 듯한 암흑이 밀려옵니다. 한편 내 눈앞을 밤낮으로 늘 감돌고 있는 안개는, 언제나 검은색보다는 흰색에 가까워지는 듯 합니다. 안구를 움직이면 마치 좁은 틈에서 비치는 것처럼 약간의 빛이 보입니다.
당신이 만났다는 의사가 내게 얼마간 희망을 주려고 하지만, 나는 이 병이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인이 경고했듯이, 나는 어둠의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예비된 것임을 상고합니다. 내 경우는 섭리의 인자하심 덕분으로, 여가와 연구 생활 틈틈이, 내방한 친구들의 음성을 듣고 있으니, 내가 겪는 어둠은 무덤 속의 어둠보다는 훨씬 관대한 것입니다.
…… 나의 친애하는 벗 필라라스여, 일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스라소니 못지 않은 용기와 담대함으로 벗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이 편지는 밀턴의 병세와 증상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친구에게 쓴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안과 의사에게 읽힐 것을 목적으로 쓴 글이다.

밀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성의를 다하여 눈병의 진행 경과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대외적인 공표를 전제하지 않는, 순수한 사신(私信)인 까닭에, 이 글은 밀턴의 병세의 추이뿐만 아니라, 그가 실명 초기의 불행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낙관적이고도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시력 상실은 신의 징벌인가?

밀턴은 필라라스에게 편지를 쓰기 4개월 전인 1654년 5월 30일에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두 번째 변명>(The Second Defense of The English People)을 출간했다. <두 번째 변명>은 밀턴의 산문 중에서 자전적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실명이 개인적인 악덕과 공적인 범죄 행위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적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다. 먼저 그는 실명한 후의 자신의 용모와 관련하여 적들의 비난이 어떤 식으로 가해졌는지를 예거하고,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무시무시하고, 추악하고, 거대한, 앞 못보는 괴물.’ 나는 분명히 용모 면에서 키클로프스(Cyclops)와 경쟁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개인의 외모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들의 사제들을 맹신한 나머지 그들이 이단자라고 부르는 자들의 외모를 그렇게 멋대로 상상했듯이, 나의 적들의 주장으로 인해 나를 개의 머리를 한 원숭이나 코뿔소라고 상상해선 안되겠기에, 나로서는 신께 감사하고 거짓말쟁이들을 반박할 이유가 있으므로, 그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내 생각에, 나는 내게 눈길을 돌린 사람 누구에게라도 추악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의 용모가 준수한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관심이 별로 없다. 내 키가 크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내 키는 작은 편이라기보다는 중간쯤에 속한다. 그러나 설령 키가 작은들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평화시와 전투시에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하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키가 작지 않은가? (미덕이 충분히 크건만 어째서 키[stature]는 작다고 해야 하는가?)”

밀턴은 우리가 흔히 그에 대해 갖고 있는 나약한 지식인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깨기라도 하려는 듯이, 자신의 체력과 검술 실력에 관해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특별히 허약한데도 없다. 나는 실로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추고 있어서, 나이와 습관에 그것이 필요할 경우, 칼을 뽑아 휘두를 줄 알았으며, 날마다 그 사용법을 익히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일단 칼을 차기만 하면, 아무리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 해도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용모가 실명하기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밀턴의 설명을 통해 그의 실명이 외모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으며, 그가 자신의 용모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때와 동일한 용기, 그 때와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때와 같은 시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내 눈은 상해를 입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좋은 시력을 가진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혼탁 없이, 맑고 명료하다.

오직 이점에서만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남을 속이고 있는 셈이다. 내 얼굴은 그가 말하듯이 ‘핏기 없는’ 것이기는커녕, 창백함과는 정반대의 색조를 띄고 있어서, 내 나이를 실제보다 10년 정도 어리게 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나의 몸이나 피부가 주름으로 가득하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내가 어떤 식으로든 속이는 것이 있다면, 나를 지켜보고 있는 수천 명의 시민들 및 많은 외국인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만일 나를 비방하는 이 사람이, 아무런 속임수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이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대담하고도 근거 없는 거짓말쟁이인지 판명된다면, 여러분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밀턴은 자신에게 닥친 운명이 신의 징벌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미덕 있는 인물들 중 실명의 비운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불행의 근원은, 실명이 아니라 실명을 참아낼 수 없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닥칠 경우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하는 일을 내가 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은 모든 인간에게 닥쳤을 뿐더러,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미덕 있는 인물들에게도 닥친 일이 아닌가?
회고하건대 고대의 음유시인들, 그리고 아득한 옛날의 현인들의 경우, 신들은 그들의 불행에 대해 훨씬 더 큰 은사로 보상해 주었고, 사람들은 그들을 크게 존경하여, 그들의 실명을 죄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신들을 비난하지 않았던가?”


조국에 대한 의무감

밀턴은 뒤이어 실명의 비운을 맞이한 역사상의 수많은 탁월한 인물들을 열거한다. 성경과 고전에 대한 밀턴의 해박한 지식이 잘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끝으로 그는 자신의 실명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명> 집필이었음을 밝히고, 의사들의 경고에 순응하는가, 아니면 신의 음성에 복종하는가 하는 양자 선택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밀턴의 글에는 공적 의무에 헌신한 영웅적 애국 시인의 비장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맹세하건대, 나의 행동의 동기가 된 것은, 야심이나 이익이나 개인적 성공이 아니라, 오직 의무감, 명예, 그리고 조국에 대한 헌신이었다. 나는 조국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교회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국왕 옹호에 대한 답변 임무가 공식적으로 내게 부여되었을 때, 그리고 때마침 건강상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나의 남은 눈마저 사실상 잃게 되어, 의사들이 내게 이 임무를 맡을 경우 곧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리라고 예고했을 때, 나는 이 경고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의사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들리는 신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운명의 명령에 의해 두 개의 제비가 내 앞에 놓여졌다고 생각했다. 그 하나는 실명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의무였다.
나는 시력 상실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나의 가장 엄중한 의무를 포기해야만 했다 …… 그러므로 나는 아직 내가 조국의 복리를 위한 큰 일을 할 수 있을 때,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시력을 쓰기로 결심했다. 당신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다.”


 

3. 밀턴 가계의 병력  

선천성 매독 가설

밀턴의 실명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데니스 소랫(Denis Saurat)의 가설이다. 그는 밀턴 가계의 병력(病歷)에 착안하여, 밀턴의 실명 원인이 모계의 선천성 매독(congenital syphilis)에 기인한 망막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서 밀턴 집안의 병력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그가 근거로 내세운 밀턴 가계의 병력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먼저 지적할 것은, 밀턴의 모친이 밀턴과 마찬가지로 시력이 나빴다는 사실이다. 밀턴에 관한 전기적 기록을 편찬한 존 오브리(John Aubrey, 1626-1697)는, 밀턴의 모친 사라(Sarah 또는 Sara)가 “시력이 매우 나빠서(had very weak eyes)” 30세가 지나자마자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오브리의 말이 옳다면, 그녀는 밀턴의 부친과 결혼한 후 1, 2년 만에 안경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밀턴의 첫 딸인 앤(Anne)은 1646년 7월 29일에 정상적인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으나, 그 후 질병을 앓고 불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외모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딸인 메리(Mary)는 1648년 10월 25일에 태어났는데, 그녀에 관해서는 의학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아들 존(John)은 1650년 3월 16일에 태어났으나 이듬해인 1651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 셋째 딸인 드보라(Deborah)는 1652년 5월 2일에 정상적인 체질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드보라의 2세들은 썩 건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열 자녀를 두었는데, 대부분이 유아기에 죽고, 두 자녀만이 살아 남았던 것이다.

밀턴의 첫 아내 메리(Mary)는 셋째 딸 드보라를 낳은 지 사흘만인 1652년 5월 5일에 죽었다. 밀턴은 1656년 11월 12일에 캐서린 우드코크(Katherine Woodcock)와 재혼했다. 1657년 10월 19일에 그녀는 딸 캐서린(Katherine)을 낳은 지 4개월 후인 1658년 2월 3일에 사망했고, 딸 캐서린 역시 태어난 지 5개월 후인 1658년 3월 17일에 죽었다. (밀턴은 1663년 2월 24일에 엘리자베스 민셜(Elizabeth Minshull)과 재혼을 했지만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밀턴의 누나인 앤(Anne)은 남편인 에드워드 필립스(Edward Phillips)와의 사이에 다섯 자녀를 낳았으나 처음 세 자녀를 모두 유아기에 잃었다. 그의 남동생 크리스토퍼(Christopher)는 첫 자녀를 유아기에 잃었다.

소랫은 밀턴 집안의 재앙을 경악으로써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그는, 밀턴 모친의 약한 시력, 장녀의 나쁜 건강 상태, 밀턴 후손들(3세)의 높은 사망률, 이에 더하여 밀턴 자신의 나쁜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할 때 “유전성(선천성) 매독 가설이 명백히 확증된다”고 단정하고 있다. 유전성 매독은 밀턴이 겪었던 것과 흡사한 증상을 보이는 눈병의 일반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소랫은 유전성 매독이 시인 밀턴의 천재성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유전성 매독이 지적 능력이란 점에서 두 가지 유형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즉, 그 하나는 비지성적이거나 백치 상태를 초래하며, 다른 하나는 반대로 조숙하고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져오는데, 밀턴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소랫은 밀턴이 조상들로부터 얼마나 비참한 육신을 물려받았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밀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밀턴이 대학을 졸업한 다음, 6년 동안이나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부친의 집에서 머물렀던 이유도, 그리고 그가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의회파 지지 입장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가지 않고 집에 남아 몇 명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란 기간 중 펜으로 전쟁을 수행한 이유도 그의 건강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그는 밀턴이 몸조심을 하면서 의사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그의 시력을 그나마 몇 년 더 길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열거된 소랫의 가설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밀턴 가계의 높은 유아 사망률을 보기로 하자. 밀턴은 직계 자녀 다섯 중 아들 하나(존)와 딸 하나(캐서린)를 잃었다. 큰 딸 앤은 정상적으로 태어났으나 질병으로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셋째 딸 드보라는 결혼한 후 열 자녀 중 여덟을 잃었다. 밀턴의 누나인 앤은 다섯 자녀 중 처음 세 자녀를 잃었다. 밀턴의 남동생 크리스토퍼는 첫 자녀를 유아기에 잃었다.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밀턴의 가계는 매우 높은 사망률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런던의 높은 유아사망률을 고려하면, 밀턴 집안의 유아사망률을 이례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밀턴이 대학 졸업 후 부친의 집에서 여러 해 동안 머문 것도, 당시 상류층의 관습에 비추어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문학 수업이나 학업 연마를 위한 은둔 생활이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경제적 여건만 허락된다면, 공부를 하기 위해 여가를 따로 내어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성공한 금융업자의 아들인 밀턴의 경우도 그 시대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밀턴이 내란 중 팜플렛 저술가로써 활동한 사실을 그의 건강 상태와 연결짓는 것도 논리의 비약으로 보인다. 논객으로서의 활동을 병약자만이 하는 일로 여기는 것도 설득력이 없거니와, 밀턴은 결코 나약한 문사가 아니었다. 앞서 밀턴의 자전적인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추고 있어서 “칼을 뽑아 휘두를 줄을 알았으며, 날마다 그 사용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 해도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밀턴의 실명 원인에 대한 소랫의 가설은, 여러 가지로 실증적인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의 빈약한 실증적 토대는, 그가 밀턴 가계의 병력을 예시하면서, 밀턴의 누나인 앤의 자녀의 경우와 밀턴의 동생인 크리스토퍼의 자녀의 경우를 혼동하고 있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소랫은 크리스토퍼의 자녀 중 세 명이 유아기에 사망했고 앤의 자녀 중 한 명이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크리스토퍼의 자녀 중 한 명이, 그리고 앤의 자녀들 중 세 명이 사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