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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

[박상익] 밀턴의 개인주의 신앙

by 안티고네 2001. 5. 12.
밀턴의 개인주의 신앙  

2000년 5월에 행한 김교신 기념 강연 원고입니다.
<성경연구> 제6호(2000년 11,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개인주의란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말입니다. 가능하면 피해야 할 풍조, 그것이 바로 개인주의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 개인주의란 말은 이기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이기주의(egoism)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서양 역사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를 많이 갖는 말입니다.

서양 근대 이데올로기 중에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게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이 자유주의를 헌정의 기본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이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가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란 그 핵심이 “개인의 자유”에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를 배제하고서는 자유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 개인주의처럼 억울하게 오해를 많이 받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저는 이것 하나만 놓고 봐도 우리의 서양 역사 내지는 인문학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떤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서양 역사를 돌이켜보면, 개인주의를 등장시킨 가장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입니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원리로서 제시된 만인사제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는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에 들어갈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적 각성과 인격적 자각을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후대에 자유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이념으로서 전개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주의라고 하는 이념이 기독교적 가치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적 발전이 그토록 지지부진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서 정착된 거의 모든 제도들은 이렇듯 기독교에 그 뿌리가 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뿌리는 없고 나무줄기만 있는 셈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각종 제도들이 빛 좋은 개살구처럼 된 데에는 이런 곡절이 있다고 봅니다. 정치뿐만 아니고, 대학이 그렇고,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강남의 귤이 강북에서 탱자가 된다는 식입니다. 요즘 서울의 대형 교회들의 운영권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부자 세습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북한의 권력 세습, 남한 재벌의 경영권 세습, 김영삼 정권 당시 김현철의 왕자 행세…….  너무나 닮은 모습들 아닙니까? 이게 뭡니까? 동양적 전제주의인가요? 말은 공화국이라면서 실상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왕정의 연속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정립되지 않을 경우, 이런 우습지도 않은 코미디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개인주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인주의란 말을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양 사회에서도 종교개혁이 천명한 개인주의적 원리는 전폭적인 환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개개인이 제각기 자신의 입장과 권리만을 주장하면서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질 경우 사회가 어떻게 존립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루터의 반대편에 서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모든 사람이 교황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신적 결합과 사회적 통합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이런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종교개혁의 결과 개인주의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사회적 통합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칼라일에 의하면, 형식과 제도에 의한 외적인 단결은 진정한 단결일 수 없습니다. 권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부과된 질서와 복종은 결코 통합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라일이 생각한 참다운 사회적 통합은 일정한 판단력을 가진 자각적인 개인들에 의해 내면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지, 비자각적인 개인들에 의해 피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칼라일은 정신적, 도덕적으로 성숙한 개개인들의 개인적 판단(private judgement)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개인들이 있는 곳에서 비로소 진정한 통합과 단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논어(論語)』에 보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나옵니다. 각 개인들이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화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공자가 말한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경지는 종교개혁적인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해서만 온전히 성취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지역 갈등 문제도 이 종교개혁적인 개인주의에 의해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특정 지역의 부속품으로만 인식하는 천박한 인간관은 개인주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우주로서의 자아에 대한 자각, 그것이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세계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 함께 동전의 앞뒤를 이루고 있습니다.

 

2.

 

17세기 영국의 청교 시인 존 밀턴은 개인주의 신앙을 가장 철저하게 주장한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 해석에서 개인의 양심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밀턴은 개인의 양심과 이성에 입각한 개인주의 신앙이야말로 프로테스탄티즘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개인주의 신앙이 굳이 마음에 걸린다면, 독립 신앙으로 바꿔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의 신앙, 밀턴의 신앙이었습니다.

밀턴의 개인주의 신앙이 가장 잘 드러난 글로서 『아레오파기티카』란 책자가 있습니다. 이 책자에서 밀턴은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맡겨놓고 살아가는 한 부자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 부자는 쾌락주의자이자 이익 추구라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황금만능주의자입니다. 그는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대단히 복잡하고 성가신 것이어서, 그 분야에 자기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 쾌락의 추구도 자제를 해야 하고, 아무래도 정직하지 못한 수단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사업상 이익이 줄어들 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자는 신앙이 좋다는 평판을 얻고 싶어하고, 또 이웃 사람들에게 관대하다는 명성도 듣고 싶어합니다. 요컨대 돈벌이도 하고 싶고 즐기고도 싶다, 그런데 신앙 좋다는 소리도 듣고 싶다, 바로 이것이 부자의 속마음이었습니다. 지극히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된 태도이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정직한 실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수고스럽고 번잡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작정을 합니다. 자기의 신앙 문제를 전담해줄 관리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관리인은 저명하고 존경받는 성직자여야 합니다. 부자는 그 성직자를 믿고 자신의 종교 문제 일체를 모조리 위탁합니다. 자물쇠도 열쇠도 모두 그의 관리에 맡깁니다. 밀턴의 표현을 직접 빌자면 이 부자는 신학자를 자신의 종교로 삼습니다. 그는 그 신학자와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간주합니다.

밀턴의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종교가 자신의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부자의 종교는 이제 자신과 떨어져서 이동할 수 있는 휴대용 종교, 포터블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 부자는 성직자가 자기 집을 방문하면 종교가 자기에게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집을 떠나면 종교가 자기에게서 멀어졌다고 말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휴대폰이나 노트북 컴퓨터처럼 아주 편리한 종교입니다.

밀턴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성직자”란 말을 “교회”로 바꿔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를 종교로 삼는 전형적인 교회주의자의 모습니다. 밀턴의 이야기는 삶과 종교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신앙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크리스천이 밀턴의 시대에도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른바 교회주의라고 하는 신앙 형태가, 아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밀턴 시대 잉글랜드에도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잠시 후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그러한 교회주의는 정말 역사가 깊어서, 중세 카톨릭 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자는 성직자를 만날 때마다 극진하게 환대를 합니다. 성직자에게 선물을 주고, 향응을 베푸는가 하면 잠까지 재워 줍니다. 성직자는 밤이면 부자의 집에 와서 기도를 하고, 후한 대접을 받고, 포도주 같은 맛있는 술도 얻어 마십니다. 아침이 되면 성직자는 훌륭한 식사를 대접받고 집밖을 나가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친절하고 신앙심 좋기로 소문난 부자는 하루 종일 종교 없이 자기 가게에서 장사를 합니다. 구약 아모스서에 나오는 대로, 아마 적당히 저울눈도 속이고, 바가지도 씌워가면서 폭리를 취할 겁니다.

이상이 밀턴이 들려준 어느 부자 이야기입니다. 밀턴이 들려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현실감 있게 이해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목사님에게 융숭하게 대접도 잘 하고, 헌금도 잘 바쳐서 장로, 집사도 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저 분은 참 믿음이 깊어, 신앙이 좋아, 아주 헌신적이야,” 이런 칭송을 듣지만, 일단 교회 울타리를 빠져나오기만 하면 세상 사람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행동하는 우리 나라의 수많은 교회주의자들의 행태를 너무나 리얼하게 그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에 나오는 부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걸 읽으면서 왜 고전을 고전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 현상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아레오파기티카』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 토막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주의의 원조 중세 카톨릭 교회 이야기입니다. 밀턴 시대에는 이탈리아의 안코나(Ancona) 부근에 로레토(Loreto)라는 카톨릭 성소(聖所)가 있었습니다. 이 로레토 성당에는 집이 한 채 딸려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카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그 집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곳이 이탈리아랍니다!) 그런데 그 집이 어떻게 이탈리아에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설명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당시의 카톨릭 평신도들은 이 집이 원래 나사렛에 있었는데, 1291년에 천사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1291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대까지 나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카톨릭 교회의 역대 교황들은 이러한 믿음을 올바른 신앙이라고 공인까지 해주고 있었습니다.

실로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 로레토 성당의 기적은 밀턴 시대의 잉글랜드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카톨릭 신앙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로레토 성당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조롱 거리로 삼곤 했던 것입니다.

밀턴은 그 부자의 신앙이나 이탈리아의 카톨릭 신자들의 신앙이나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두 경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직자를 휴대용 종교처럼 활용한 부자와, 로레토 성소에서 예수가 잉태되었다고 믿었던 이탈리아의 카톨릭 평신도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는 신앙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자는 카톨릭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카톨릭과 다를 바 없는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밀턴은 카톨릭 신앙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카톨릭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신앙에 대해서도 똑같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부자의 종교는 무늬는 프로테스탄트였지만 내용은 카톨릭이었던 것입니다.

밀턴에 의하면 중세 카톨릭 교회는 신앙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믿는 신앙>(explicit faith)이었고, 또 하나는 <권위에 근거한 신앙>(implicit faith)이었습니다. 고위 성직자에게는 전자가, 그리고 하위 성직자와 평신도에게는 후자가 요구되었습니다. 몇 안 되는 고위 성직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권위에 근거한 신앙>에 머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밀턴이 볼 때 카톨릭 신도들 대부분이 추종하는 <권위에 근거한 신앙>은 기독교 신앙,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밀턴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라면 마땅히 모든 평신도가 종교적 권위의 간섭에서 벗어나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밀턴에 의하면 아무리 고명한 신학자라 해도 그 신학자의 성경 해석이 신자 개개인의 양심에 입각한 해석과 일치할 때에만 그 해석은 신자에게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신앙 양심에 입각해 성경 진리를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의 성경 해석일지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 신앙, 독립 신앙만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 프로테스탄트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설령 프로테스탄티즘을 표방하더라도, <권위에 근거한 신앙>은 결코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밀턴이 개인주의 신앙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가 자기 배꼽만 쳐다보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했거나 또는 그런 삶을 살라고 주장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밀턴은 44세 때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만, 그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밀턴 스스로 자청한 것입니다.

조국 잉글랜드의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위해 의사들의 경고를 무시한 채 자신의 몸을 혹사시킨 것이 그가 완전 실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입니다. 밀턴은 사명을 자각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그리스도인으로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대의를 위해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책 읽기와 책 쓰기를 직업으로 삼는 학자에게 시력 상실이란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사실 밀턴의 개인주의는 루터보다도 진일보한 것으로서, 그는 명실상부하게 철저한 독립신앙, 개인주의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임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자신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김교신 선생 또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사명을 자각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고자 모든 것을 바쳤던 것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자신의 교사직마저도 부업으로 여기고 성서조선 간행을 본업으로 여겼습니다. 성서조선은 전 호에 걸쳐서 적자를 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생활비에서 남는 돈으로 성서조선을 간행한 것이 아니라, 성서조선 간행을 하고 남은 돈으로 생활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희생을 목사가 하란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시킨다고 하겠습니까? 여기에 개인주의 신앙의 진면목이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인주의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무교회 신앙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4.

무교회 신앙은 결국 개인주의 신앙, 독립 신앙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무교회 신앙이 한국 기독교에 대해 공적으로 기여할 분야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결론은 물론 저의 개인적 판단입니다. 그 결론은 이렇습니다. 무교회 진영은 한국 기독교에 텍스트를 제공해 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교회는 YMCA같은 공공시설을 빌려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기본은 각 가정에서 행해지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정 집회를 하다보면 한 가지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성경 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각종 서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교회 신앙운동의 확산과 전파를 위해서는 좋은 텍스트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무교회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 전체에 대해 훌륭한 자극제가 됩니다. 

텍스트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한국 무교회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텍스트들을 발굴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우리 무교회 진영에서 지금부터 새롭게 성경 진리를 탐구하여 텍스트를 생산하는 길입니다. 저는 첫 번째 방법, 즉 기왕에 확보되어 있으면서도 거의 땅속에 묻혀 있다시피 한 기독교 신앙 텍스트들을 끄집어내어 햇빛을 보게 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김교신전집』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에 초판이 선을 보인 후 80년 전후해서 재판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절판이 되어서 구해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집』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2월에 노평구 선생님께 전화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아는 출판사를 통해 복간을 하면 어떻겠냐고 건의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은 미국에 김교신 선생 자제분들이 계신데, 이분들에게 언젠가 모든 판권을 넘기겠다고 약속을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 마음대로 특정 출판사에 맡겨서 전집을 새로 낼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여하튼 선생님의 생각이 그러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전집 출판을 밀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제가 출판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사정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교신 선생께서 작고하신 지 이미 50년이 넘어버렸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대로 방치할 경우 예기치 않게 엉뚱한 출판사에서 멋대로 편집해서 전집을 찍어내도 아무도 제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4월에 다시 선생님께 이러한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전집』을 내야만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김교신전집』은 이제 김교신 선생 후손들만의 사유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의 공적 자산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덧붙이기를, “노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항상, 우리 사회에 공적으로 기여할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지 않았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왕에 무교회 신앙이 산출한 훌륭한 기독교 고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땅 속에 묻어 놓은 채 사장시킨다는 것은 공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런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왕에 출판할 거라면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만큼 회원제로 예약 받아 한정된 독자에게만 배포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고,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본격적인 상업 출판을 하는 것이 시대의 추세에 비추어 바람직하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것이 곧 무교회가 할 수 있는 전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밀레의 <씨뿌리기>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노평구 선생님의 『전집』 표지에도 그 그림이 나와 있습니다. 아주 힘차게 온 힘을 다해 멀리 씨를 뿌리려는 동작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면서, “아, 책을 내려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시장 논리에 맞게 본격적인 상업 출판을 해야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까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를 말씀드렸지만, 밀턴이 이 책에서 말한 언론, 출판의 자유도 시장 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었습니다.) 

노 선생님께 저의 이런 생각을 몇 번 말씀드렸더니, 얼마 전 마침내 선생님께서는 전집 복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혹시 실수가 있을까 하여 노 선생님의 의중을 세 번에 걸쳐 전화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26일에 부키 출판사에서 저희 집으로 사람이 와서 제가 가지고 있던 『김교신전집』(전집 6권과 추억집을 합쳐 7권)을 모두 출판사로 가져갔습니다. 컴퓨터로 가로쓰기를 해야 하니 당연히 타이핑을 새로 해야 하고 한자는 모두 괄호 안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편집 과정에서 읽기 어려운 단어와 문장은 약간씩은 손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과정은 편집 전문가에게 일단 맡기되, 필요할 경우 우리 쪽에서 필요한 조언을 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편집과 표지 디자인은 물론, 광고와 마케팅까지 모두 출판사에서 맡아서 해 줄 것입니다. 아마 금년 가을쯤이면 『전집』 중  한 두 권 정도가 시중 서점에 선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파묻혀 있는 텍스트를 또 한 권 출간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노 선생님의 회갑 기념문집으로 1972년도에 나온 『성서와 인간』이란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계와 교육계에 계신 분들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무교회 진영 필진이 동원되어 각기 신앙과 전공을 연결시켜 쓴 문집입니다. 

조요한 숭실대 총장, 이환 서울대 불문과 교수, 고병려 연세대 영문과 교수, 김정환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유희세 고려대 수학과 교수, 조명한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임능빈 부산대 심리학과 교수 등 수십 명의 쟁쟁한 필진이 참여했습니다. 그리스 철학, 임마누엘 칸트, 프란츠 카프카, 키에르케고르, 파스칼, 단테 등 서양의 고전 사상, 문학, 철학에 대한 주옥같은 에세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노 선생님의 『종교와 인생』(전5권)도 그 중에서 약 100편 정도의 글을 추려서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펴낼 계획으로 있습니다. 저는 그밖에도 노평구 선생님의 『마태복음 강연』 중에서 산상수훈 부분만을 따로 뽑아 책으로 내놓을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진행되면 한국 기독교에 대해, 아니 한국 사회에 대해 큰 일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가 한국 사회에 기독교 신앙 텍스트를 공급함에 있어서, 기왕에 나왔던 텍스트뿐만 아니라, 새로운 텍스트의 생산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 방면으로도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연사로 말씀을 했던 장문강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인 『루터의 정치사상』도 내용을 고쳐서 책으로 내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가제목이긴 하지만 이미 제목도 정했습니다. 『루터를 위한 변명』입니다. (물론 제목은 차후 변경 가능합니다.) 장문강 박사는 그밖에도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해』 등을 번역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칼 힐티를 새롭게 번역하는 계획도 갖고 있는 줄로 압니다. 물론 저 또한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낼 계획으로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무교회 진영의 수많은 책들이 전국의 서점들을 가득 채우고, 한국의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무교회 진영에서 출판된 책을 읽지 않고서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말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저는 무교회 신앙의 본령이 한국 기독교를 위한 진리의 생산 및 공급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노 선생님께서는, “한국에 기독교 인구는 많아졌다, 그러나 내용이 없다, 그 내용을 무교회 진영에서 채워 넣어야 한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신앙 고전을 생산하는 임무는 온전히 무교회 진영에 있다고 봅니다. 이 임무를 교회 쪽에 기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김교신, 노평구 선생님이 평생토록 추구해오셨던 방향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한국 무교회 신앙의 1세대와 2세대를 대표하는 두 분께서 우리 민족과 사회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김교신전집』과 『노평구전집』이기 때문입니다. 

“Publish or Perish!” 라는 말이 있습니다. 출판하라,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이런 의미가 됩니다. 저는 이 말이 우리 무교회 진영에서 앞으로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할 금과옥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당부를 드리자면, 지금은 고학력 시대입니다. 박사 학위 소지자가 옛날 일제 때 고등학교 졸업생만큼도 희소가치를 갖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적인 글을 쓰더라도 어느 정도 학문적 수준이 유지되는, 그리하여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 세상 기준으로 판단을 해도 욕을 먹지 않을 만한, 그런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유희세 선생님께서 언젠가 무교회 신앙을 게릴라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만, 그 말씀은 우리 무교회 진영이 교회 사람들과는 다른, 이를테면 특수 부대와 같은 특별한 임무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저술 활동 역시 타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적・학문적으로 모두 만족스러워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특수 부대는커녕 패잔병 수준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변하는 시대 속에 살면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낼 줄 아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적어도 이 시대가 우리 무교회 진영에 기독교 고전을 생산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 판단입니다. 

물론 신앙은 자유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모두 제 생각에 동의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저는 이 일을 해나갈 작정입니다. 저 역시 개인주의 신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바라기로는, 모쪼록 젊은 층에서 제 생각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제 순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