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 선생님께
박상익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전에 통화했던 문학평론하는 고영직입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잡지 <기전문화예술>의
원고 청탁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낮에
통화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인문학적 가치에 대해
자유롭게 집필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
빕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번역 없는 나라에도 미래가 있을까?
독일 대학에서 한국학 전공자들의 석사, 박사 학위논문 중 절반 이상은 번역으로 채워지고 있다. 예를 들면 튀빙엔대학에서 최제우(崔濟愚)의 <안심가(安心歌)>에 대한 번역으로 석사학위가 수여되었고, 현재 보쿰대학에서 김인후(金麟厚)의 <백련초해(百聯抄解)> 번역으로 박사학위 논문이 작성되고 있는 중이다. 모두 정밀한 주석이 덧붙여진 연구번역이다. 이점은 영국, 프랑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동양학자들은 연구하려는 문헌이 자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을 경우, 원칙적으로 그 문헌을 번역하는 것으로 연구의 첫 출발을 삼는다. 19세기에 제임스 레그는 수많은 중국 고전을 영역했고, 막스 뮐러는 무려 51권에 달하는 인도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들에게 동양학이 외국학이듯, 우리에게는 서양학이 외국학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양 연구를 번역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서양 연구를 번역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을까? 그들이 동양고전을 번역하여 자국어의 콘텐츠를 끝없이 확충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서양의 다양한 지식을 모국어로 텍스트화 하여 축적하는 것이 ‘상식’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대학에서는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시중에는 오역과 비문(非文)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이 판치고, 동서양 고전의 상당수는 아예 소개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텍스트 없는 사회’이다.
번역이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눈여겨 볼 대목은 번역사업이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정부 내에 번역국(飜譯局)을 두고 조직적으로 서양 서적들의 번역을 추진하여, 불과 10여년 만에 수천 권의 서양고전학술서들을 번역해냈다. ‘번역을 통한 양질의 모국어 텍스트 확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일본과 견주어 100년 이상을 뒤지고 있다.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의 번역사에는 ‘잃어버린 100년’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이미 19세기에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시작한 일을, 우리 사회는 지금도 그 필요성마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정부 차원의 번역지원은 1999년부터 시행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명저번역 지원사업’이 전부다. 해마다 17억원 안팎의 예산이 지원되며, 연 평균 50과제씩 선정되고 있다. 국민의 교양과 정신을 살찌울 지식 인프라에 투입하는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다. 19세기 일본과 비교하자면 ‘거지에게 동전 몇 푼 쥐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같은 지원 규모라면 앞으로 100년이 지나야 동서양고전을 합쳐 5천 종의 번역물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잃어버린 10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0년’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빨리빨리’로 유명한 우리가 왜 유독 번역 사업에는 이토록 여유작작한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정부에만 떠넘기기도 힘든 상황이다. 무릇 국민은 그 수준에 걸맞은 정부를 갖기 마련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5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월 책이든 신문이든 잡지든 글로 된 상품을 사는 데 들인 돈은 한 가구에 1만원 남짓인데, 그 중 3천 원은 신문 구독료라고 한다. 그러니 책을 사는 데 들인 돈은 한 ‘가구’(한 ‘사람’이 아니다!)에 월 7000원 남짓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 국민에 그 정부’라 했던가. 국민이 이토록 책과 담을 쌓고 있으니, 정부가 번역을 통한 지식 인프라 구축에 무관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18세기 유럽에는 어찌나 각종 출판물이 범람했는지, ‘교양의 위기’가 식자층의 두려움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독서량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독서과잉’으로 인한 위기였다. 18세기 유럽의 사회지도층은 독서가 너무 지나치게 보편화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컨대 자유주의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존 로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로크의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식자층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 대부분은 무지를 자비로운 신이 하층계급의 비참함을 덜어주기 위해 내려주신 아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나친 독서는, 마치 오늘날 지나친 텔레비전 시청이 일종의 문화적 해악으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두려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서 풍조의 확산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1800년경에 이르러 서유럽인들은 대단히 집중적으로 독서를 하고 있었고, 이러한 읽기와 출판의 광범한 증가 속에서 서유럽은 구술(口述) 사회에서 활자(活字) 사회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우리는 이런 황금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다. 독서에 대한 의지도 빈약하지만, 설령 생각을 바꿔 독서를 하고자 해도 신뢰할만한 텍스트가 태부족이다.
얼마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거론되고 있지만, 나는 이 용어에 거부감을 느낀다. ‘인문학의 위기’는 서양 사회처럼 텍스트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추락할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지식 인프라 구축이란 점에서 우리 인문학은 해방 이후 한번도 잘 나가본 적이 없지 않은가. 특히 번역은 더욱 심각하다. 해방과 더불어 겨우 본격 시작된 모국어 텍스트 생산 작업은, 떡잎 단계부터 영양실조 상태로 비틀거리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우리 귀에 익은 ‘번역은 반역’이란 말은 번역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담론이다. 해럴드 블룸은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번역 불가능성’이 자명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번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번역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자국어로 씌어지지 않은 인류의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텍스트들은 사장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우리의 번역 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한 나라가 갖고 있는 지식의 질과 양은 곧 그 나라의 국력이다. 번역에 대한 우리 학계와 정부, 그리고 국민의 인식에 획기적인 전환이 없다면 21세기 국가경쟁력 제고는 요원하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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