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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회 자료

[펌]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by 안티고네 2006. 2. 11.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당시 시사평론가, 2001년 1월호)
“베를린 와서 교회 자랑하던 김선도 목사 설교에 기겁했다”

옛날에 광림교회의 김선도 목사가 베를린 와서 설교를 하는데 정말 못 듣겠더라고요.
끔찍해서. 우리 교회의 헌금이 얼만데, 그 중에 얼마를 아프리카에 뭐를 짓는데 썼다는 둥,
자기 자랑을 막 하는 거예요.

조그만 교회 와 가지고 말이지. 엄청 열 받았죠. 하나님 돈인데 왜 김선도 목사가 자랑을 하죠? 대단치도 않은 사람을 큰 교회 목사라고 불러다가 설교시킨 주최 측도 짜증 납니다. 조그만 교회에도 좋은 목사님 많잖아요.

큰 교회 목사님들 설교는 만날 그거거든요. 완전히 남대문 장사꾼들처럼 정형화된 패턴. 목소리도 정형화되어 있고요. 완전 상품이거든요.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2001년 5월호)
“기독교는 좋아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중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녔다. 대학 다닐 때 교회를 좀 다니면서 청년회 활동도 좀 했다. 그때도 날라리 신자였다(웃음).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천이 아니다. 지식으로서의 기독교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지만. 버트란트 러셀처럼 ‘기독교는 좋아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온 사람들이 대개 매우 악했습니다”-편집자 주)
함석헌 선생 같은 무교회주의자를 존경한다.


▲ 홍성담 화가 (2001년 7월호)
“기독교 신앙은 없다. 그래서 굉장히 자유롭다”

-대형 교회의 세습을 어떻게 보나

교회가 지 것인가, 예수 것이지. 신의 것이고 신의 아들의 것이지.
교회를 소유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지. 한국 교회는 성장한 만큼 타락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이고 그분과 만나는 자리 아니가.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런 교회가 어떻게 개인의 재산이 될 수가 있나. 이런 환장할 노릇이 어디 있는가.

대형 교회의 세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진다.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손님으로 들어와서 못된 짓거리를 많이 했다. 기독교의 덩치가 엄청나게 커져 이젠 정치도 어찌 못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놓고 국민운동을 전개할 수 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한국 기독교가 살려면 스스로가 자성하여 이 땅에서 저질렀던 해악들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설자리가 없다. 갈수록 그럴 것이다.


▲ 김규항 컬럼니스트 (2000년 8월호, 2001년 9월호)
“지금 한국교회는 유대교에 가까운가, 예수에 가까운가"

-조갑제 씨와 지만원 씨가 요즘 보수적인 기독교인에게 총궐기를 부추기고 있다.

조갑제 씨가 기독교인인가? 하긴 극우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긴 하다. 우리나라 극우 세력은 조갑제 씨를 빼면 아무도 없다. 전부 미친놈들뿐이다.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한국논단>의 이도형 씨 같은 사람을 보면 어우, 할 말을 잃는다. 조갑제 씨는 정신병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지만 뚝심도 있고 전략 전술을 구사할 줄도 알고 신념에 가득 차 있다. 보수 기독교 쪽으로의 진출은 아주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국민일보>의 조희준 씨가 검찰에 불려 다니고 있으니까 어떤 신자들은 교회가 핍박받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김근태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 2001년 12월호)
“왜 우리나라 신부나 목사들은 예수를 서양 사람으로 묘사하나”

왜 예수는 꼭 서양 사람이어야 하는가? 혹시 신부님이나 목사님들께서 예수가 서양 사람이라고 가르치거나 그렇게 그림을 그림으로써 종교 전문가들이 갖는 신비함을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서 종교 지도자들의 몫을 계속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덮어놓고 우리 것을 고집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것을 새롭게 해석도 하고 오늘에 적용을 할 때만이 세계 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고, 세계 문화와 진정한 만남이 있을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다.


▲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당시 문학과지성 상임고문, 2002년 1월호)
“과거에는 기독교의 본질 때문에, 지금은 신자들 때문에 신앙 갖기를 주저한다”

-한국 교회에 대한 실망이 교회를 떠나게 했나.

청소년 시절, 그러니까 5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신의 존재를 실체로 믿는다든가 부활을 문자 액면 그래도 믿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비기독교적인 사유들을 접촉하게 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요즘 와서는 기독교 본질과 관계없이 교회의 타락, 신자들의 독선에 대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증오감을 느낀다. 신을 믿고 안 믿고는 그 자체로 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한 인간을 평가하고, 교회를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로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할 수 있겠나.

인하대학의 강의를 위해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 타려고 하면 어떤 한 분이 인천행 수원행 표지판을 들고 승객들에게 "인천행입니다, 수원행입니다"라고 외친다.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하지만 인천행 수원행 팻말 한 귀퉁이에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이 적혀 있다. 신자는 이런 사람이 아닐까.

유럽의 사람들은 예의와 양보와 희생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기보다는 한 인간의 도리와 양식으로서 한다. 이에 반해 우리 한국 기독교는 하느님이라든가 예수라든가 교회란 말을 숱하게 외치는 데 정작 사회를 향한 그러한 미덕이나 양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전에는 기독교의 본질 때문에 교회를 포기했지만 지금은 한국 교회와 그 신자들의 못마땅한 행태 때문에 신뢰감을 못 가지고 있다.


▲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인 (당시 <한겨레> 기획위원, 2002년 3월호)
“시대는 21세기를 넘었으나, 한국교회 신자들의 이성은 기원전에 있다”

가톨릭의 기본적인 입장이 이웃 사랑이다. 바로 예수님 말씀이다. 합리주의자·이성주의자의 판단이지만 구약과 신약의(상식적으로 들었지만) 어법이 다른 것은 그 당시의 이성의 성숙 단계에 맞춘 것이다.
구약은 유아기니까 어린아이에게 하듯 쓰인 것이고 예수님이 오신 때는 이성의 성숙 단계가 청소년기에 왔기 때문에 이웃 사랑 산상수훈 등으로 쓰인 것이라 들었다. 이것이 이성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구약과 신약의 말법 차이에 대한 해석이다. 그것을 한국 사회에 가져왔을 때 개신교 현상은 한국 사회의 이성의 성숙 단계가 신약 시대 이전은 분명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하드웨어는 그야말로 21세기를 달리고 있지만 이성은 신약 시대 이전이다. 어쩌면 유아기에도 더 못 미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전래의 기복성과 합쳐져서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주 공격적으로 표현되는 곳이 한국의 개신교다. 그러면서 또 굉장히 물질적이다. 한국 사회의 병든 모습이 개신교 속에서도 반영된 것 같다.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실존적 자아로서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정말 어렵다.


▲ 김훈 소설가 (2002년 4월호)
“회개가 가장 불가능한 사람들은 종교인이다”

-언론사의 편집국장을 지낸 선생으로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종교인들처럼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회개가 가장 불가능한 사람들이 종교집단이다. 도그마 때문일 것이다. 저들은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남들은 악이라고 본다. 회개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변선환 목사의 파동의 바탕에도 아마 자기가 선일 뿐 아니라 남을 악이라고 보는 도그마가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 내부에서 벌어진 변선환 목사 파동을 보면서 한국 기독교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독교가 이래 가지고는 민족의 미래에 무슨 희망을 주겠나. 우리 시대의 종교인이란 현실 인간의 사회 속에서 공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도그마가 이해관계와 직결되었을 때 더욱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교리와 도그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것을 남을 위해 희생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그것일 것이다. 남을 위해서 양보할 만한 선의가 인간 속에 살아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확인해야 할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다.


▲ 정연주 KBS 사장 (당시 <한겨레> 논설주간, 2003년 1월호)
“‘빈민 찾지 말고 전도하라’라는 한경직 목사 설교 듣고 실망해 교회 옮겼다”

굉장히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컸다. 배냇 신자였고 어려서부터 정말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가장 친한 친구와 만들던 학생회 신문에 강원룡 목사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우리 교회는 그 때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헌금 강요가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금 할당을 하고 매주 주보에 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란을 떨면서 헌금을 한 부자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더 높게 평가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헌금을 강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친구와 나는 분개했었다. 바로 그 때 강원룡 목사가 한국 기독교의 부패에 대해 썼던 것이다. 우린 강원룡 목사가 누군지도 몰았었다. 그 일로 교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장로님이셨던 아버님은 어느 날 새벽기도회를 다녀오시더니 막 야단을 치셨다. 당장 그 신문을 회수하라고 했다. 그 일로 나는 교회에서 치리를 당했다. 그 친구는 교회를 떠났고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에 와서는 영락교회를 다녔다. 대학교 3학년 때 회의가 많이 왔다. 이건 답이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그 일 가지고 한경직 목사께서 설교에서 신랄하게 비난을 했다. "대학생들이 전도는 안 하고 무슨 빈민가 조사냐"는 것. 그렇게 비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 즉시 영락교회를 그만 두었다. 교회를 안 다니다가 그 뒤 안병무 박사를 만나게 됐고, 향린교회를 나가면서 성서를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그 때가 1969년이다. 향린교회에서 출석하고 난 1년 뒤 대학부 학생 10명이 영락교회를 탈출했다. 그 때 탈출한 친구 중 하나는 작년인가 올해에 향린교회 장로가 되었다. 안병무 박사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다.
열심히 성경강좌를 들었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나는 그 분에게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문제,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배웠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 언론의 자유를 압살한 정치권력의 불의,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게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을 배웠다. 기독교는 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