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쓰카모토 선생의 20년 간의 고심의 역작인 신약성서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의 대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기쁨을 표시하고, 또한 조선의 개역(改譯) 출현을 빌며, 선생의 수많은 개역 관련 논문 중 최근 <성서지식(聖書知識)>지 제270호(1952년 10월)에 실린 "성서 개역의 의미"와 이번 출판 견본에 실린 "출판에 즈음하여"라는 두 글을 여기 옮겨 싣는 바이다.
[성서 개역의 의미]
고전은 부단한 개역이 필요하다고 한다. 성서도 일종의 고전이니까 끊임없이 개역될 필요가 있다. 도리어 다른 고전 이상으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이 개역을 필요로 하는 주요한 이유는, 번역문이 시대의 변천으로 어렵게 또는 부적절하게 되는 점, 그리고 그 고전에 관한 연구의 진보 때문인데, 성서에 있어서는 그것이 한층 심하다.
성서는 고전이면서도 더욱 현대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전으로서 감상할 것도 아니고, 이 시대 사람들의 살아있는 읽을거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일반인에 의해 애독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성서만큼 최신의 현대어 역을 필요로 하는 것은 없다고 하겠다.
또 원전 연구의 측면에서도 어떤 고전도 성서학만큼 진보가 빠른 것도 없다. 예를 들면 그 본문은 해마다 개정의 필요성이 생긴다. 1950년에 20판을 낸 독일의 네스틀레 교정본은 금년 말에 21판이 나올 모양이다. 매년 놀랄만한 수의 주해서와 사전, 문헌 등이 출판되는 것으로 보아, 원어와 문법의 연구 및 해석의 진보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보와 연구에 응하자면 거의 매년 성서를 개역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개역을 좋아하지 않는 강한 반대의 경향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카톨릭 정신이라고 부른다. 새 번역은 위엄이 없다느니, 지루하다느니 하는, 틀에 박힌 비난은 결국 신앙을 전통적인 틀 속에 잠재워 두자는 교회 정신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예를 들자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식의 귀에 익숙하지만 박력이 없는 말투를 좋아하고,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는 식의 직접적인 말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정신이 제롬 이후 모든 개역자들을 박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시대에 아주 벗어난 161년의 킹 제임스 역이 대부분의 교회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의 신인 악마는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린도후서 4: 4)고 바울은 말한다. 참 개역은 악마와의 싸움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작은 종교개혁이다.
[출판에 즈음하여]
인생길 절반에 남은 생애를 성서 연구에 바치려고 결심했던 틴들(Tyndale)이 "나는 호미를 손에 쥔 잉글랜드 소년들이 언젠가는 교황보다도 성서를 더 잘 알게 할 것이다"라고 한 말에 움직여서, 나는 일본에서 구어역 성서 완역의 길을 틔우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1931년 정월부터 신약상서의 구어역(口語譯)을 시작하여, 매월 내 자신 발간하는 <성서지식>지에 1장 또는 2장씩 번역하여 실으면서, 1944년 10월에 일단 이 작업을 완료했다. 그 후 개정을 가하여 출판을 결심, 1948년 봄에는 한 신문에 어마어마하게 기사까지 날 정도였으나, 성서 번역 자체에 대한 나의 생각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마가복음의 경우는 일곱 번이나 원고를 다시 썼다.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Worttreue 즉 문자에 충실하는가, 아니면 Sinntreue 즉 의미에 충실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 개역에서는 이것이 신앙의 문제가 된다. 카톨릭적 신앙을 벗지 못한 영국 번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표준라틴어(불가타)의 영향 아래 있고,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넘치는 독일 번역은 루터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자는 문자에 집착하고, 후자는 의미를 자유롭게 번역해 내려고 한다. 영미의 번역의 영향을 받은 우리 번역 성서는 한 자 한 구절을 노예적으로 번역해내려 했기 때문에, 나의 주안점은 이 악영향에서 탈피하여 순 프로테스탄트적인 독일식 번역으로 하는데 모아졌다.
그러나 본 번역은 아직도 문자에 너무 충실하여 나의 이상에서 퍽 멀다. 하나님이 만일 허락하신다면 가까운 장래에 자유로운 번역을 대답하게 시도해 보려고 하나, 현재로서는 문자에도 충실하고 또 될 수 있는 한 초심자에게도 의미가 통할 수 있도록,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듯한 본 번역을 20여 년의 노력의 열매로서 사랑하는 나의 조국에 바치고자 한다.
본 번역을 하면서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참고했다. 나 자신의 신앙이나 의견은 섞지 않고, 유력한 학자들의 다수 학설에 의지하는 방침을 세웠다. 다만 근래에 새롭게 나온 과학적 성서 연구가, 오랜 동안 카톨릭 정신에 의해 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구부리고 감추고 있던 전통적 해석을 타파했기 때문에, 성서가 우리들에게 친근한 것으로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부족한 번역이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바 되어,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조금이라도 더욱 가까이 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서연구> 제34호 (1952년 10·11월)
밀레 <씨뿌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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