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신앙 생활을 돌아보니 크게 세 단계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각 단계는 나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확실히 하나의 위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때그때 무사히 이를 돌파하게 해주신 하나님 앞에 무한한 감사가 솟는다.
첫째, 신앙이 순전히 외적이었던 시기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 자신이 신앙을 이용한 시기이다. 그 때의 신앙이란 나의 공부를 위해, 혹은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나의 이상 달성을 위해, 또는 사회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있었고 또 필요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나의 신앙 생활이란 부족하나마 나로서는 생명을 걸고 교육에 종사하고 밤잠을 안 자고 사회 사업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끝에서 내가 철저히 깨달은 것은, 사회 사업도 교육도 사람을 높은 의미에서 행복하게 할 수 없고, 또 도덕적으로 사람을 향상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즉 아무리 사회적인 복지 시설과 경제적인 수입을 도모해도, 그것을 통해 더욱 부도덕이 조장되었다. 소년, 소녀를 교육시키면 이것이 도리어 불미한 길로 빠져 들어가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부유층이나 지식층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이리하여 나의 차후의 신앙 생활은 외부에서 내부로, 도덕 문제로 전환되었다. 즉 철저한 도덕의 실천으로, 이것이 나의 신앙의 둘째 단계이다. 이리하여 나에게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수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게는 이성(異性)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는 시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낡은 옷을 걸치고 지게를 지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는 것으로 그윽이 심중 하나님 앞에 기쁨을 느꼈다. 한때 나는 서울 어느 빈민굴에서 살았는데, 이때 수년 동안 매일 두세 곳의 공동변소 청소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나는 일제 시대 광주학생사건으로 체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한 일이 있었는데, 이력서에 쓸 때마다 이를 쓸까말까 하고 망설였다. 한번은 어느 일본인에게 이력서를 제출하는데, 처음에는 이를 빼고 제출했다가 4, 5일을 고민한 끝에 이를 고백한 일도 있었다.
한편 나는 고명한 선생들을 찾아가 교훈과 체험에 귀를 기울이고, 또 서적을 통해 정신력의 함양에 주력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도덕이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뜻을 찾아 부지런히 성서를 읽었다. 또 옛날부터 도덕적인 위대한 인물들이 다 기독교 신자였다는 점에 나의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근거를 두기도 했다.
이 때 확실히 내 신앙은 도덕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시기에 스스로 넘어지게 된 것은, 초기에 내가 어느 정도 만족했던 나의 도덕 생활에 차츰 금이 가고 급기야 파산을 보게 된 때문이었다. 도덕 생활이라 하여 만족을 느낀 것도 한때 뿐, 차츰 이에 전전긍긍, 얇은 얼음을 밟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나는 도덕을 열심히 행하려 하면 할수록 한사코 이를 불순하게 하고, 이에 거역케 하는 알지 못할 힘이 내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는 내가 나의 눈꼽만한, 그나마 더러운 자기 도덕에 자부를 느끼기 시작한 때라, 당시의 나의 실망과 당혹과 비애란 지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정반대로 급전직하, 도덕에서 죄악으로, 하나님에서 사탄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문제의 해결을 앞날에 바라는 희망도 신뢰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나의 무서운 죄악에 대한 규탄자, 심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였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던가, 나는 내 도덕에 넘어져 예수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내 눈에서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내 두 어깨에서 무거운 내 죄의 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사실로 체험하게 되었다. 이제 나에게는 빛나는 하나님의 의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지혜와 내 의와 내 거룩과 내 구속이 되었다(고린도전서 1: 30). 내 신앙은 이제 사업과 도덕으로부터 복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예수를 통해 하나님에 머물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의 자발적인 열심을 거쳐 은혜에 이른 것이다. 이제는 온 인류와 역사가 하나님을 저버려도 나 자신 홀로 그를 아버지로, 나의 구주로 믿을 수 있다. 그가 주는 기쁨을 통해 모든 슬픔을, 고통을 이길 수 있다. 아니, 그가 주는 생명으로 죽음도 이길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신앙의 최종 3단계이다. 진정 감사가 없을 수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만세!
<성서연구> 제27호 (1951년 11월)
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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