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은 #번역청을설립하라 국민청원 덕분에 여러 매체에 불려가느라 바빴다. 2018년 2월에 진행한 <신동아> 인터뷰가 가장 본격적으로 디테일하게 번역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자리다. 그 때 올렸던 글을 수정해서 다시 올린다. 쓰다보니 '나답지 않게' 긴 글이 돼버렸다. 즐거운 글읽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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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번역청을 설립하라' <신동아> 인터뷰 뒷풀이 자리에서 기자분이 내게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내가 드린 답변은 존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 언론자유의 경전>이었다. 사진 왼쪽은 1999년 소나무판(절판)이고, 오른쪽이 2016년 인간사랑판(전면개정판)이다.
1부는 원문의 번역과 주석이고, 2부는 연구다. 2부는 독립된 한권의 연구서로 봐도 된다. 80년대 초 대학원 석사과정 때 김용옥 교수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고 나도 언젠가 번역/주석/연구를 아우른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밀턴의 영어 문장은 '장엄체'(grand style)라고 해서 라틴어풍이 많이 가미된 훌륭한 문장이라고 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한문에 조예 깊은 한학자가 쓴 문장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하지만 그건 영어권 얘기고, 영어를 외국어로 접근하는 나 같은 한미한 연구자에겐 '난해함' 그 자체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온종일 한 문장을 번역하기 위해 씨름하던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레오파기티카>를 번역하면서 <옥스포드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OED)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위대함'이라니!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힐난해도 상관없다. 아직 우리에게는 OED에 필적하는 한국어사전이 없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런 유의 한국어사전은 나올 수 없을 듯하니까.
('표준한국어사전' 편집, 출간하는 꼬라지 보면 견적이 나오지 않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문화 정책'이란게 있기는 한거냐? 세종대왕 타령은 그리 하면서 우리가 그의 정신을 실천한게 뭐가 있나? 졸부근성만 있을 뿐이다.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뽑아놓은 꼬라지를 보라구!)
각설하고, OED는 단어 하나하나의 탄생과 의미변화 과정을 추적한 세계 유일의 사전, 항목 하나하나가 그대로 '개념사'(Begriffsgeschichte)인 사전이다. (독일어, 불어에도 이런 사전은 없다.) OED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다. <교수와 광인>이란 책도 오래 전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멜 깁슨, 숀 펜 주연의 영화도 2019년 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엔 개봉도 안 했다. 개봉해봐야 흥행이 안 될 것 같으니 그랬겠지. 모국어사전에도 관심없는 졸부 사회가 남의 나라 사전 편찬 따위에 관심 있을 리 없잖아.
밀턴은 라틴어에 조예가 깊어서 새로운 영어단어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원래 고전어가 조어력이 강하다. 한자가 그렇잖아), Webster니 뭐니 하는 수많은 다른 영어사전을 찾아도 없던 단어가 OED에는 떡하니 나와 있었다. 단어 뜻만 나오는게 아니다. 밀턴이 그 단어를 사용한 ‘예문’까지 정확하게 인용되어 있는 것이다. 찾아도 찾아도 나오지 않는 낯선 단어들의 숲속에서 지쳐가던 내게 그 감격이란 목마른 자가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마실 때의 감격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한 자만이 그 기쁨을 알리라! 이걸 모르는 자는 번역을 논할 자격이 없다.
20년 가까이 <아레오파기티카>를 주물럭대다보니 밀턴의 사상이 내 사상으로 체화된 느낌이다.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밀턴의 맥락에서 깊이 공감하고 지지하게 되니 어느덧 밀턴은 나의 멘토가 되어 있었다. 고전 공부의 부수 소득이라고 하겠다. 부수라고 했지만 이거야말로 연구 번역의 알짜가 아닐까 싶다. 나도 모르게 밀턴을 사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외의 주요 고전 텍스트를 젊음을 바쳐 번역한다는 것은 우리의 세계 인식이 그만큼 촘촘해짐을 의미한다. 일류 국가, 문화국민을 형성하기 위한 주춧돌 한 개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AI 번역으로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설령 AI에 의한 고전번역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기계가 번역한 걸 설렁설렁 읽는 것과, 한 단어 한 문장의 의미를 탐구하고 한땀한땀 각주와 해제를 붙이면서 고전 작가의 정신을 흠모하고 사숙하는 것, 이 둘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세계의 주요 고전을 한국의 전문가들이 하나씩 꿰차고 앉아 번역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젊음을 바쳐, 아니 인생을 바쳐 사마천, 노자, 장자, 토마스 아퀴나스, 플라톤, 데카르트, 키에르케고어, 파스칼 등을 연구하여 한국어 번역으로 내놓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인 중에 해당 전문가가 최소 한명씩은 '존재'한다는 얘기 아닌가.
여러 명이 있어서 서로 치열한 토론과 경쟁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요원한 꿈이다. 한국 인문학의 현실은 어부의 그물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단 한명의 전문가도 찾아볼 수 없는 분야가 한국에 얼마나 많은가. 10여년 전 TV다큐 프로그램에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편을 진행하는데, 백발이 성성한 일본 교토대학 교수가 나오더라. 일평생 앙코르와트만 연구한 학자라고 했다. 지금 한국에 앙코르와트 전문가가 단 한명이라도 있나? 아마 없을 것이다.
한국 대학에 '인도사' 교수가 부산외국어대 이광수 교수 한 분 뿐인데, 그가 정년하고 나면 그나마 인도사 교수의 씨가 마를 거라고 한다. 인도 인구가 중국을 곧 능가한다고 하지 않는가. 수출로 먹고 산다면서 인도마저 이렇게 무지몽매의 상태로 방치하는 우리에게 언감생심 앙코르와트 전문가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앙코르와트는 하나의 예일 뿐, 그 정도로 우리 인문학이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는 뜻으로 새겨주기 바란다.)
<아레오파기티카> 원문은 1644년 출간되었으니 4세기 전 영어다. 미국서 대학 교육받은 사람도 쉽사리 읽지 못하는 영어다. 그런데 번역본을 읽는 한국 독자는 적어도 미국 독자들이 영어로 읽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왜? 번역본은 '현대 한국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영미권 독자들이 '4세기전 영어'라서 난해해 못 읽고 멀리하는 고전 텍스트를, 한국 독자들은 현대 한국어로 훨씬 쉽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고전 번역의 순기능이다. 서양 독자가 외면하는 서양 고전을 한국 독자가 더욱 손쉽게 읽게 만드는 것,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가 세계에 우뚝서는 '문화국민'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원대한 민족이상을 갖자!
물론 밥이나 먹고 사는게 목적인 졸부 나라를 꿈꾸는 국민에겐 이런 노력은 아무 쓸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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