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 번역 단상.
1. <실낙원> 한국어 번역은 <김교신평전> 집필과 더불어 나의 중요한 버킷 리스트 중 하나다.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한 장기 자가격리가 동기부여를 한 셈.) 몇 권의 <실낙원> 영문판과, 영문학자인 유영, 이창배, 조신권 선생 등의 기존 번역을 토대로 한 글자씩 대조해가면서 번역 중이다. 밀턴 산문의 최고봉 <아레오파기티카>를 번역했고, 국내 유일의 <밀턴평전>을 쓴 저자로서, 밀턴 서사시의 최고봉 <실낙원>을 번역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다. 게다가 이건 영문학자 아닌 역사학자의 번역이다.
2. 나는 학부 3, 4학년 시절부터 역사, 문학, 종교의 학제적 줄타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한때 대학원을 영문과로 진학할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결국 서양사로 방향을 굳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턴이란 주제를 택했다. 종교개혁과 청교주의에 헌신한 시인의 삶을 역사학으로 들여다보는 종교/문학/역사의 경계인으로 자처한 것. 경계인이기에 좋은점도 많았다. 내가 한국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추진할 수 있는 단독자, 자유인의 행보를 할 수 있었던 것.
3. 세 분 선배께서 닦아놓은 길이 있기에, 그 덕분에 후학이 '거인의 어깨 위의 난쟁이'처럼 더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 분의 번역이 모두 장점과 결함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세 분의 장점을 취하고 거기에 나의 장점을 녹여내면 완성도를 훨씬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4. 번역 목표는 '간결'하고 '유려'하고 '가독성' 높은 한국어 <실낙원>이다. 고전 번역은 모국어에 새로운 고전 콘텐츠를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현대어로 새롭게 번역될 필요가 있다. <실낙원> 그 자체도 영미권 독자들에겐 너무 어려운 옛날 영어라서 현대 영어로 번역한 영문판 <실낙원>이 출시되어 있다. 현대 영어 판은 지난달 해외 주문을 했으니 다음 주엔 받아볼 수 있을 듯하다.
5. 어제 제1장 초역을 마쳤다. 역시나 밀턴의 반가톨릭적 성향은 놀랍다. 지옥에서 사탄이 주재하는 '비밀회의'가 원문에는 ‘콘클라베(conclave)’로 되어 있다. 교황선거 추기경회의를 말한다. 밀턴이 가톨릭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가톨릭에 호의를 품은 독자라면 불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밀턴의 글을 읽을 때는 17세기 당시의 양극화된 종교적 적대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만일 밀턴이 오늘날의 개신교, 특히 한국 개신교 상황을 본다면 틀림없이 개신교 목사들을 사탄의 무리로 묘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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