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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칼럼·글

번역이야말로 외국학 연구에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기초공사

by 안티고네 2017. 8. 17.

김용옥은 번역이 정당한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일본이나 서양이 방대한 중국 고전을 자신들의 언어로 수백 년 전부터 번역하고 연구해 온 데 반해, 한국의 경우는 우리나라 고전조차 철저한 국역이 되어 있지 않으니 도저히 그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는 <동양학 어떻게 할것인가>(1985)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필자는 우리나라 동양학계의 발전을 위하여 불가불 하나의 구체적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각 대학의 동양학 부문에서 나오는 석사․박사 학위논문을 가급적 번역 위주로 회전시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엔 학위논문이 어떻게 번역이 될 수 있느냐고 지금까지의 통념으로 저항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일본을 실례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교육체제가 모델로 생각해 온 유럽과 미국의 여러 대학들에서는 지극히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논문의 대상이 번역이 부재(不在)하는 고전일 경우에는 거의 백퍼센트에 가까운 기정사실이다."

김용옥은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은 하버드대학교의 경우 동양학 관계의 박사학위 논문의 반 이상이 번역으로 점유되고 있다고 밝힌다. 혹자는 서양 사람들이 동양학에 대한 소양이 없으니까 번역밖에 못 한다고 빈정댈지 모르나, 지난 1백 년 동안 우리가 그들을 배운 것보다 그들이 우리를 배운 태도가 훨씬 더 철저하고 치밀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번역이야말로 외국학 연구에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기초공사이기 때문이다.

김용옥은 미국 대학의 경우를 말했지만 독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튀빙엔 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를 지낸 백승종의 말은 김용옥의 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독일 대학에서도 한국학 전공(독일인에게 한국학은 분명 외국학이다) 석사․박사 학위논문의 절반 이상은 번역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철저한 역주와 해제가 곁들여진 ‘연구번역’이다. 실제로 최제우(崔濟愚)의 <안심가(安心歌)>, <고려사실록>의 ‘성황당신앙(城隍堂信仰) 관련 부분’에 대한 연구번역으로 석사학위가 수여되었고, 현재 보쿰대학교에서는 김인후(金麟厚)의 <백련초해(百聯抄解)> 연구번역으로 박사학위 논문이 작성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점은 이웃나라인 프랑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외국학(중국학과 한국학) 전공의 석사․박사 학위논문 절반 이상이 번역으로 점유되고 있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해야 할까? 그들에게 동양문명이 외래문명이듯이, 우리에게는 서양문명이 외래문명이다. 그들에게 동양학이 외국학이듯, 우리에게는 서양학이 외국학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양 연구를 번역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서양 연구를 번역을 통해 접근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그들이 외래문명을 자신들의 언어로 텍스트화 하여 자국의 지식과 정보를 확충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우리의 모국어로 텍스트화 하여 축적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모국어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의 표명 아닐까? 후손들을 위해 이 시대 지식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아닐까? 

--박상익 지음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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