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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김준엽 선생님

by 안티고네 2011. 6. 10.

김준엽 선생님

2011.06.10


화요일인 6월 7일 아침, 신문을 보며 오전 회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여직원은 사회과학원이라며 전화를 바꿔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온 여성이 사회과학원이라고 할 때도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네? 어디라구요? 그러다가 김준엽 이사장님 비서라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전화를 했을까. 하마터면 “앗, 이사장님 돌아가셨나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습니다. 그 전화는 역시 김준엽 이사장님이 오전 10시 2분에 돌아가셨다는 부고였습니다.

그날 선생님의 비서에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벌써 몇 년째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그 비서는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며 사회과학원에 몇 번 다녀간 사실을 기억하고, 타계하신 지 30분도 되지 않아 알려온 것이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되지? 갑자기 일손이 잡히지 않고 세상이 텅 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재를 당부하고 회사 명의로 조화를 보내도록 조치한 게 맨 먼저 한 일입니다. 인터넷에 1보를 빨리 띄우라고 제보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가 인터뷰하자고 하고 신문에 글 써 달라고 조르곤 했습니다. 광복 50년을 맞은 1995년, 한 페이지에 걸쳐 그분의 글을 실은 것이 시작입니다. 이후 신년호를 만들 때나 광복절이 되면 으레 그분을 떠올렸습니다. 편집국장일 때는 2004년 12월과 그 다음해 광복 60년을 맞았을 때 등 두 번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나는 정치ㆍ시국에 대한 견해나 비판을 기대하면서 유도질문을 하곤 했지만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언제나 사전에 질문서를 보내달라고 해 그 질문에 맞춰 성심성의껏 답변을 하고, 정치 이야기는 묻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도록 했습니다.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약속을 하고 나서 좀 느긋하게 있다가 질문서를 보내기로 한 기한을 어기자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한번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그분에게 나의 행동은 약속 위반이었던 것입니다.

맨 처음 사회과학원으로 찾아갔을 때 나는 좋은 양주 한 병을 들고 갔습니다. 그걸 스승을 처음 뵐 때 드리는 예물인 속수(束脩)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악수를 한 뒤 “아, 술 가지고 왔구나. 이리 줘. 나 술 좋아해.”이러면서 편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는 계속 담배를 피웠는데, 나에게도 “담배 피우구려.”하고 자꾸 권해서 맞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인터뷰는 참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특히 그분은 하하하 하고 커다랗게 칠판에 글씨 쓰듯 통쾌하게 웃기를 잘 해서 나도 덩달아 웃곤 했습니다.

그분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2004년 12월에 한국과 중국의 교류를 주제로 한 인터뷰였습니다. 반세기도 더 전에 한ㆍ중 학생교류를 시작하고, 중국 11개 유명 대학의 명예교수로 활동해온 김 이사장은 한ㆍ중 교류를 이야기할 때 가장 신명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신문에 나간 기사를 나중에 동판으로 만들어 드렸더니 “이건 내가 학교(고려대) 그만둔 뒤 놀지 않았다는 증거야.”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김준엽 이사장은 꼿꼿한 지성으로 존경 받아온 원로였습니다. 나이만 들면 아무나 원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광복 투쟁에서 시작돼 민주화에 기여하고, 영원한 학자 야인으로서 지조와 소신을 잘 지킨 삶은 그야말로 아름다운‘장정(長)’이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총리 제의를 거절한 다섯 가지 이유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 씨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한 부분입니다(일기).

나와의 인터뷰 때는 “5공화국 때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고려대 총장에서 쫓겨난 덕에 독립운동사 이야기를 담은 ‘장정(長征)’도 쓰고, 한국일보에 독립운동사도 연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두환이 고맙다.”며 하하하 하고 웃었지만, 독재자 전두환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했습니다.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에 갔던 김 이사장은 장준하와 함께 탈출해 6,000리 길을 걸어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갈 때에도 남의 것을 한 번도 훔쳐 먹은 적이 없다고 했던 분입니다.

구십 평생을 참 선비로, 민족의 사표로 살아온 그분은 오늘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됩니다. 그러나 8일 오후에 찾아간 빈소는 의외로 쓸쓸해 보였습니다.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추도사에서 “추모의 글을 쓸 때는 떠난 이를 회상하며 슬퍼하는 마음이 앞서기 마련이지만, 김준엽 선생의 죽음 앞에서는 그의 떠남을 슬퍼하기보다 우선 그 삶의 완성에 감탄하고 부러움을 느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썼습니다. 슬프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조 교수의 말이 그대로 다 맞습니다. 저절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김 이사장의 연구실 벽에는 ‘斷學無憂(단학무우)’라는 노자 <노덕경> 20장의 말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역설인데, 이제 영면의 길에 들었으니 근심도 없어지게 된 것일까요? 이제 어디서 그런 인물을 다시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필자소개

임철순

1974년부터 한국일보 근무. 현재 주필. 시와 술과 유머를 사랑하고,
불의와 용렬을 미워하려 애쓰고 있음. 호는 淡硯(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