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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칼럼·글

[그때 오늘81]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망

by 안티고네 2010. 3. 16.
[그때 오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기마상은 고대 세계에서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조각 작품 중 하나다.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로마 기마상을 파괴했지만, 이 작품은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으로 오인하고 내버려두었다. 이 조각상은 2세기부터 로마 시내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공해를 피해 실내로 옮겨졌다.

2001년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글래디에이터’ 끝부분에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망나니 아들 콤모두스가 반란에 실패한 막시무스(러셀 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쇠사슬에 묶인 막시무스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콤모두스에게 말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고 말했지.” 그러자 콤모두스는 “그 친구도 죽을 때 웃었는지 궁금하군”이라며 ‘그 친구’와 막시무스를 비웃는다.

그러자 막시무스는 ‘그 친구’가 바로 콤모두스의 아버지라고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막시무스는 미소로써 죽음을 맞는다. 막시무스야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아들’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영화 속 막시무스는 가공의 인물이고 두 사람의 대화도 지어낸 이야기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180년 3월 17일 사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라고 당부한다.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맞는 태도라는 것이다.

“지나온 날을 헤아리지 말며, 그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 데려 온 것은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연출가의 명에 따라 무대를 떠나듯이. 아직 연극의 5막을 다 끝내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인생에서는 3막으로 극이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가의 소관이지 네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요컨대 인생의 종말이 언제 오건 평정을 잃지 말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라는 당부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다 같이 행복을 추구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쾌락’에서 행복을 기대한 것과 달리 스토아 학파는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그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귀감으로 삼았다.

노예를 ‘살아 있는 도구’로 간주하던 고대 세계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평생 노예 출신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55~135)를 스승으로 흠모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만민평등사상을 배웠다. 스토아 철학이 로마법, 특히 만민법의 기초가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로마법은 그 후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 법체계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와 ‘만민평등의 휴머니즘’은 우리 시대에도 빛을 발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3/16/3654460.html?cloc=olink|article|defau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