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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칼럼·글

[조선][시론] 오역과 非文의 번역서가 판친다

by 안티고네 2009. 1. 13.

[시론] 오역과 非文의 번역서가 판친다

 

입력 : 2006.01.24 19:23 / 수정 : 2006.01.24 19:23


▲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
독일 대학에서 한국학 전공자들의 석사·박사 학위논문 중 절반 이상은 번역으로 채워지고 있다. 예를 들면 튀빙겐 대학에서 최제우(崔濟愚)의 ‘안심가(安心歌)’에 대한 번역으로 석사학위가 수여되었고, 현재 보쿰대학에서 김인후(金麟厚)의 ‘백련초해(百聯抄解)’ 번역으로 박사학위 논문이 작성되고 있는 중이다. 모두 정밀한 주석이 덧붙여진 연구번역이다. 이 점은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동양학자들은 연구하려는 문헌이 자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을 경우, 원칙적으로 그 문헌을 번역하는 것으로 연구의 첫출발을 삼는다. 19세기에 제임스 레그는 수많은 중국 고전을 영역했고, 막스 뮐러는 무려 51권에 달하는 인도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들에게 동양학이 외국학이듯, 우리에게는 서양학이 외국학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양 연구를 번역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서양 연구를 번역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을까? 그들이 동양 고전을 번역하여 자국어의 콘텐츠를 끝없이 확충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서양의 다양한 지식을 모국어로 텍스트화하여 축적하는 것이 ‘상식’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대학에서는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시중에는 오역과 비문(非文)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이 판치고, 동서양 고전의 상당수는 아예 소개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텍스트 없는 사회’이다.

 

번역이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눈여겨볼 대목은 번역사업이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정부 내에 번역국(飜譯局)을 두고 조직적으로 서양 서적들의 번역을 추진하여, 불과 10여 년 만에 수천 권의 서양 고전 학술서들을 번역해냈다. ‘번역을 통한 양질의 모국어 텍스트 확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일본과 견주어 100년 이상을 뒤지고 있다.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의 번역사에는 ‘잃어버린 100년’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이미 19세기에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시작한 일을, 우리 사회는 지금도 그 필요성마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정부 차원의 번역 지원은 1999년부터 시행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 명저 번역 지원사업’이 전부다. 해마다 17억원 안팎의 예산이 지원되며, 연평균 50과제씩 선정되고 있다. 국민의 교양과 정신을 살찌울 지식 인프라에 투입하는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다. 19세기 일본과 비교하자면 ‘거지에게 동전 몇 푼 쥐여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같은 지원 규모라면 앞으로 100년이 지나야 동서양 고전을 합쳐 5000종의 번역물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잃어버린 10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0년’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빨리빨리’로 유명한 우리가 왜 유독 번역 사업에는 이토록 여유작작인지 알 수 없다.

 

우리 귀에 익은 “번역은 반역”이란 말은 번역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담론이다. 해럴드 블룸은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번역 불가능성’이 자명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번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번역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자국어로 쓰이지 않은 인류의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텍스트들은 사장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다. 그러나 우리의 번역 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한 나라가 갖고 있는 지식의 질과 양은 곧 그 나라의 국력이다. 번역에 대한 우리 학계와 정부의 인식에 획기적인 전환이 없다면 21세기 국가경쟁력 제고는 요원하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1/24/20060124705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