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최대의 스캔들, 그리고 대학의 탄생
메리온 미드 지음, 김승욱 옮김, <하늘을 훔친 사랑>1, 2 (궁리, 2000)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던 중세 유럽에 살면서도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여인, 그래서 소녀시절부터 ‘여자의 몸에 남자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들었던 한 여인이 있다. 재색을 겸비한 여인 엘로이즈(1101-1164)이다. 1118년 그녀의 삼촌이자 노트르담의 참사회원인 풀베르는 당대 일급의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에게 총명한 조카 엘로이즈의 교육을 맡겼다. 처음으로 아벨라르를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17세, 아벨라르는 학자로서 명성을 널리 떨치던 한창 나이의 39세였다.
22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엘로이즈가 브리타뉴에서 아벨라르의 아들을 낳고서 파리로 돌아온 뒤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을 했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풀베르는 사람들을 시켜 아벨라르를 거세시켰다. 아벨라르는 생드니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고,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이 수녀원이 해산되자 아벨라르는 자신이 설립하도록 허락받은 파라클레 수도원 터를 엘로이즈와 그녀가 이끄는 수녀들에게 주었고, 엘로이즈는 천신만고 끝에 이 터전을 가꾸어 대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녀가 아벨라르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주제로 삼은 다양한 형태의 문학을 낳았다. 이 소설은 그 최신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 작가인 메리온 미드는 치밀한 고증과 자료 수집을 통해 소설을 썼다. 특히 자신을 수녀원에 보낸 아벨라르를 원망하지도 않고 전보다 더 깊이 그를 사랑한 당당한 여성, 엘로이즈의 삶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친다. 소설은 연대기적으로 엘로이즈의 삶을 따라가고 있다. 개인 가정교사로 들어온 아벨라르와의 첫 만남, 열정적인 사랑과 임신, 출산, 삼촌 풀베르가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벨라르를 거세한 일, 아벨라르의 충고에 따라 엘로이즈가 수녀원으로 들어가고 아벨라르 역시 수도사가 된 과정, 그 후로도 꾸준히 계속된 둘 사이의 편지 교환, 아들과의 만남, 아벨라르와의 재회, 아벨라르의 죽음 등의 이야기가 파란만장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아무래도 엘로이즈보다는 아벨라르에 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아벨라르는 ‘3천명이 넘는 제자를 거느린 세계 최고의 선생님’이자 ‘소크라테스의 환생’으로 불리고 있다(1권 97쪽). 특히 ‘12세기에 파리가 유럽 학문의 중심이 되고, 프랑스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국가들에서 수천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몰려오는 이유가 전적으로 아벨라르 때문’이라는 대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1권 198쪽). 심지어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이 도시(파리)를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이다(1권 197쪽).
아벨라르에 대한 이런 평가는 연인을 흠모한 엘로이즈의 일방적인 과대평가였을까? 아니면 작가가 지어낸 허구일 뿐일까? 천만의 말씀. 아벨라르에 대한 소설 속의 묘사는 과대평가도 허구도 아닌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로 아벨라르의 어마어마한 명성에 힘입어 파리대학이 중세 최고의 대학으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이란 제도는 전적으로 중세 유럽이 만들어낸 고안물이다. 특히 파리대학은 13세기에 신학, 법학, 의학 등의 학과를 개설하여 교수진을 구성하고, 학사, 석사, 박사 등의 학위를 수여했다. 개설된 전공이 많지 않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대학 제도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 산재한 수많은 대학들의 기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종국에는 13세기 파리대학에 이르게 된다. 파리대학 교수 중 일부가 잉글랜드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을 열었고, 옥스퍼드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교수가 뛰쳐나가 만든 것이 케임브리지대학이다. 유럽에서 발생한 대학 제도는 신대륙 미국에서 하버드대학 등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19세기 일본은 이 같은 서양의 대학 제도를 본받아 동경제국대학 등을 설립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대학은 일본이 수용한 대학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대학은 분명 고등교육기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등교육기관이 다 대학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성균관은 고등교육기관이긴 하지만 ‘대학’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태학, 고려의 국자감도 ‘대학’이 아니다. 대학의 세 가지 주요 구성 요소인 교과 과정, 교수진, 학위제도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이 이끌었던 아카데미 학원도 고등교육기관임에는 분명하지만 ‘대학’은 아니다.
파리대학이 ‘무(無)’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고려대의 전신이 보성전문학교, 연세대의 전신이 연희전문학교이듯이, 파리대학의 전신은 파리성당학교이다. 아벨라르는 파리성당학교 시절 최고의 철학 교사였다. 스콜라 철학의 기초를 놓은―하지만 그 자신은 아직 완전한 스콜라 철학자가 아니었던―아벨라르는 일찍이 학생 시절부터 논리학과 신학에 지극히 능통하여, 파리 부근의 교사들과 논쟁을 벌여 그들을 공개적으로 굴복시키곤 했다. 오만한 행동으로 인해 그는 적을 많이 만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1121년에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일이 복잡하게 얽히느라고 이 무렵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이 터져 거세의 봉변을 당했다. 엘로이즈는 수녀가 되었고, 아벨라르는 수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지극히 논쟁적인 성격이어서 수도원에서도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수도원 두 곳에 머물다가 수도사들과 다툼을 벌인 끝에 갈라섰고, 그 후 1132년부터 1141년까지 파리에서 교사로 정착했다. 이 때가 그의 생애의 절정기에 해당한다.
아벨라르는 전 유럽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했다. 전거가 다소 의심스럽지만 그 당시 유포되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어찌나 강의를 잘했던지, 그의 신학적 입장이 문제가 되어 프랑스 ‘땅’에서 강의하는 것이 금지되자 나무 위로 올라가 강의를 했는데, 그의 강의를 듣고자 학생들이 그 아래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 프랑스 ‘공중’에서 강의하는 것마저 금지되자 강에 배를 띄워 그 위에서 강의를 하자 학생들이 강둑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아벨라르의 학문적 명성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이 운집했고, 그 학생들을 보고 수많은 교사들이 파리에 정착했다. 눈 덩이가 부풀듯이 학생과 교사들이 늘어났다. 그 결과 파리 성당학교는 프랑스의 다른 어떤 성당학교보다도 다양하고 수준 높은 강의를 개설했다. 1200년에 이르러 마침내 파리 성당 학교는 ‘대학’으로 도약한다. 청년 시절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 재위)는, 당시의 파리성당학교를 일컬어 ‘전 세계를 위해 빵을 굽는 오븐’이라고 불렀다. 파리대학은 이 대학을 중세 유럽 최고의 대학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아벨라르와 그의 연인 엘로이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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