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믿음의 선배들

[독자서평]<함석헌 평전>

by 안티고네 2001. 8. 31.
000 님의 홈페이지에서 00 님의 친구 김기명 님이 올린 글을 퍼왔습니다. 김기명 님은 총신대 대학중입니다. 시사하는 바가 많은 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히,

"내게 있어 무교회주의는 주류 기독교회에 외치는 ‘광야의 소리’라고 생각이 되네. 난 제도교회가 비성경적이며 올바르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제도교회는 매개의 변증법에 의하여 본질인 하나님과 인간보다 앞설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네. 카톨릭 교회가 대표적인 예가 아니던가. 무교회주의는 이러한 제도 교회를 깨우고 본질을 바라보게 하는 좋은 비판세력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네.
조금 이기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네만 나는 무교회주의를 이용하여 볼 생각이네. 내가 언제든지 교단의 정치꾼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을 비판할 도구로 말이야."

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기적’이라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회 분들에게 이용 당하기 위해 무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친우 00에게......

그제는 주일이었네만 난 대학부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대예배 후 점심을 먹고 바로 서점으로 향했다네. 요즈음에 너무 책을 읽고 싶었거든.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씨가 쓴 <남자 vs 남자>―이 책은 <신동아>에 연재되던 심리학적 인물 비평이라네.―를 읽고 나서 <함석헌 평전-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를 읽었다네.

그다지 길지는 않은 책이었지만 나에게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이었어.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아마 자네도 이 책을 다 읽었겠지. 사실 누군가의 전기 한권만 읽고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한국에서 인물비평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강준만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그가 한 달에 쓰는 책 값이 무려 200만원이 넘는다더군. 자기가 비평하려는 인물에 대해서 “거의 안 읽어 본 자료가 없다.”고 자부한다고 하네. 내가 <함석헌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함석헌’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게 되었을까? 사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보아도 과언을 아닐 것이야. 이제 겨우 시작을 한 것일 뿐.

그러나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진리인 것 같으이. 적어도 책 한 권 읽고는 함석헌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말일세. 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던가.


함석헌의 신앙여정

내가 우선적으로 함석헌의 생애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것은 그의 신앙여정이었다네. (직업적인 습관인가?) 우선 그는 엄격한 청교도 영성 아래 있는 장로교회에서 유년기를 보낸다네. 그러면서도 숙부를 통하여 ‘기독교적 민족주의’의 기초를 쌓게 되네.

기독교적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볼 때엔 당시의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지배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기독교를 지목했던 것 같아. 즉, ‘복음보다는 민족’이라는 생각으로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일세. 내가 볼 때에 함석헌 역시 그러하였던 것 같네. 다른 자료를 읽어보지 못하여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책에는 그의 ‘회심’이나 ‘중생’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예상한다네.

3·1 운동 이후 그의 인생과 신앙에서 큰 변화의 모습이 보인다네. 3·1 운동의 실패와 보수적인 기독교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당시 한국의 기독교회가 근본주의로 흘러감에 따라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네. 함석헌 역시 그 당시의 제도적 교회에 굉장한 회의를 가졌던 듯 하네.

이 시기의 교회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상반된 해석이 있다네. 우선 총신이나 고신 등으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내지는 ‘근본주의’ 권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교회의 순결을 지켰다.”는 관점으로 보고 있네. 한국의 교회들이 일찌감치 “비 복음주의자”들을 끊어냄으로 말미암아 당시 서구 사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의 물결과 사회주의, 공산주의로부터 교회의 순결을 지켰다는 것이지.

이해 반해 ‘한신’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신학적 자유주의를 말하네)권에서는 그 일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수구 기득권 세력과 손잡게 되었다고 비판을 한다네.

아무튼 그 이후로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으로부터 민족주의를,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였던 류영모로부터 동양철학을, 조지 폭스 등의 책으로부터 퀘이커주의를, 칼라일로부터 과학주의를 접하게 되네. 내가 볼 때 이 시기에 함석헌의 평생의 학문과 신앙 추구의 길이 정해진 듯 보이네. 그것은 민족의 정통과, 신앙과(이것은 상당히 많은 변화를 거치지만) 세계주의와 과학일세.

이 때에도 그는 신앙보다는 민족을 앞에 놓는다네. 그리고 그는 평생 민족 혹은 인간을 신앙보다 위에 놓게 된다네.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이 그와 나의 근본적인 출발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일본으로 유학하여 잠시 사회주의 이념으로 인하여 갈등하던 함석헌은 또 김교신과 우치무라 간조를 통해 하나의 신앙흐름을 만나게 된다네. 그것은 자네도 알다시피 ‘무교회 주의’였다네. 한국의 주류 기독교회에서는 무교회주의가 마치 ‘이단’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한 때 손양원 목사님을 비판하던 무리들이 근거로 든 것이 손목사가 우치무라 간조의 책을 즐겨 읽기 때문이었다는군.)

내게 있어 무교회주의는 주류 기독교회에 외치는 ‘광야의 소리’라고 생각이 되네. 난 제도교회가 비성경적이며 올바르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제도교회는 매개의 변증법에 의하여 본질인 하나님과 인간보다 앞설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네. 카톨릭 교회가 대표적인 예가 아니던가. 무교회주의는 이러한 제도 교회를 깨우고 본질을 바라보게 하는 좋은 비판세력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네.

조금 이기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네만 나는 무교회주의를 이용하여 볼 생각이네. 내가 언제든지 교단의 정치꾼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을 비판할 도구로 말이야.

아무튼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만나고 나서야 세례를 받게 되네. 그가 정말로 그 때에 무교회주의를 통해서 회심하였는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세. 어찌 되었든 이 때가 그의 신앙여정에서 가장 ‘복음주의’적인 한 때였다네. 그의 이러한 복음주의적 신앙(그가 ‘복음’을 소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생활은 그가 ‘감방대학’이라고 부른 옥살이를 살기 전까지 이어진다네.

감옥 생활 가운데서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을 연구하면서, 또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는 다원주의 노선으로 선회하게 되네. 아니, 이 책만을 놓고 볼 때 어쩌면 그는 애시당초 ‘복음주의적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기도 해.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신앙 혹은 계시보다 우선이었으니 말일세.

주류 기독교회의 ‘속죄관’에 대한 그의 입장은 주목해 볼 만 하다네. 김세윤 박사의 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내포적 대신’일세.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우리 대신 받으신 ‘대신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함께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내포된 ‘대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세.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속죄관을 거부한다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 됨이었다네. 인간들 모두가 자주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며, 속죄는 각자가 예수와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라는 주장이라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그의 속죄관을 비판한다네. 뭐, 자네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첫째로, 그의 속죄관은 그의 인간론에서 출발하는데 그것은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일세.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네. 즉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네.

둘째로, 인간의 처지가 그러하므로 구원은 인간의 밖에서 와야만 하는 것일세. 즉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를 위하여(pro nobis)’ 구원의 힘이 와야만 한다는 것이라네. 즉 은혜로만,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한 것일세.

무교회주의와 결별 후에 그는 50년대 말까지 그의 이러한 다원주의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신앙관을 고수한다네. 당시의 권력과 비판한 한국 교회를 호되게 질타하지. 아, 나도 이 시기의 교회사를 읽어볼 땐 한숨만 나온다네. 부정선거의 일등공신이 바로 기독교회였다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이승만 독재정권과 야합한 것이 또한 기독교회였다네.

지금도 한국 교회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힘’으로 전도하려고 한다네. 아니, 교세를 확장하려고 한다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야. 언론에서 교회의 타락상을 보도하면 “선교 방해다”, 탈세혐의로 국민일보 전 회장을 구속하니 “정부는 교회를 탄압하지 말라”로 맞서더군.

요즈음 주 5일제 시행에 관해서 “성경은 6일 동안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한다, 주 5일제 시행되면 사람들이 노느라 교회에 못 와서 교인 수가 감소할 것이다, 이것은 반공 세력인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정부여당과 북한 김정일의 음모다.”라고 주장한다니 그들은 과연 ‘복음의 능력’을 믿고나 있는 것일까? 얼마나 자신들이 설교하는 복음에 자신이 없으면 주 5일제 근무로 교인 수 줄 것을 염려할까?

함석헌의 신앙관은 60년대에 들어 또 다시 크나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간통죄로 인한 깊은 영적 침체와 고뇌를 겪으며 퀘이커주의에 귀의한 것일세. 퀘이커주의는 일면 무교회주의와 비슷한 것도 같네. 교회 조직에 대해서 부정적이니 말일세. 그러나 퀘이커주의와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는 계시관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듯 해.

무교회주의가 철저하게 66권의 성경말씀을 특별계시로 인정하는 반면에 퀘이커들은 ‘내적 광명’을 중시한다네. 성령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지. 또한 사회 현실에 대해서 별반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던 무교회주의에 비해(<성서 조선>의 경우는 조금 다른 듯하지만) 퀘이커주의는 사회참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네.

아,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예수의 대속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에 다다르려 했던 함석헌이지만 그 스스로 죄의 문제를 결국 해결하지 못한 셈이니 말일세. 함석헌 같은 위인도 그러한데 나 같은 범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 할렐루야.

그의 말년의 신앙에 관해서는 사람들마다 하는 말이 달라 더 이상 쓰는 것이 어려울 듯 허이.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임종을 맞았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끝까지 다원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이들도 있고...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 문제에 관심을 가져 무엇 하겠는가?

가끔씩 나는 교회에서 어떤 훌륭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훌륭함과 업적에는 관심이 없고 “그 사람 교회 다녔어?”, “근데 그 사람 자유주의자였대.”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만난다네. 이 얼마나 유치한 짓인가?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복음주의자냐 아니냐 하는 기준만 있다네. 즉, 교회를 다니지 않으므로 우리 편이 아니고, 복음주의자가 아니므로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네. 비약이 조금 심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유치한 편 가르기는 결국 기독교 패권주의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운동가로서의 함석헌-이상주의자

최근에 들어서 내 비전을 더욱 구체화시켜가고 있다네. 올 해 들어서 ‘참여적 영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 앞으로의 목회의 길에 대해 ‘운동가적 지성인, 운동가적 목회자’로 정의해 보았다네. 우선 나는 현실을 품는 지성인이 될 것일세.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지 않는 교리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듯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모든 학문은 의미가 없는 것일세.

난 참으로 열심히 공부해 볼 생각이네. 그러나 너무 깊이 공부하는 바람에 세상으로 눈 돌리지 못하게 된다면 그 공부는 주저 없이 끊을 것일세. 또한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회자의 삶을 살 것일세. 공동체의 지체들을 교회 안에만 가두어 놓는 목회자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고, 소금 맛을 내는 성도들을 길러내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네.

결국 나의 이런 학자와 목회자의 꿈은 궁극적으로 ‘운동가’에 다다르게 된다네. 평생을 예수 운동을 하고 살겠네. 내 나름의 정의로 예수 운동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방법으로 예수님이 꿈꾸시던 세상을 만드는 일’일세.

물론 아직은 너무도 미약한 나에게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방법’, ‘예수님이 꿈꾸시던 세상’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겠지.

‘운동가’로서의 함석헌은 매우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네. 3·1운동과 간디의 영향이었을까? 그는 언제나 비폭력 평화주의자였어. 때문에 민주화 운동이 상당히 과격화되던 80년대에는 상당한 비판도 받아야 했지. 그러나 나는 그의 비폭력이 옳다고 보네.

물론 불의에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에 대해서 쉽사리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비폭력과 평화의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불의에 대해 투쟁하는 것은 마땅한 것일세. 함석헌은 분명 당시의 불의한 정치권력, 제도 교회를 향해 싸우던 투사였네. 예수 그리스도 불의한 당시의 유대교와 지도자들, 타락한 세상을 향해 외치시던 분이었다네.

그러나 두 분 모두 폭력을 쓰시지 아니하셨네. 끝까지 사랑과 화평, 온유와 겸손으로 불의에 대해 대항하셨지. 함석헌은 예수의 삶과 운동을 따르려 애썼던 사람이었다네.


다원주의 비판

그에 대해서 생각한 것들이 이 밖에도 많네만 자네 읽기에 지겨울 테니 각설하고 이 책을 읽으며 상당히 거북함을 느꼈던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해서 말해 보세. 짧은 논리이지만 꾹 참고 들어주길 바라네.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 혹은 여타 근본주의적 종교들의 독선을 비판하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다원주의가 또 다른 독선은 아닌가 생각된다네. 각기 종교나 사상마다는 분명한 상이점이 존재하네. 그것이 다원주의자들의 생각처럼 비본질적인 부분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본질적인 부분에 그 상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일세.

기독교를 예로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만약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정상은 하나라고 주장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 독선적인 주장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종교가 서로 충돌되는 독선적인 주장들을 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일세. 그렇다면 “이것은 빼고, 저건 넣자.”를 결정하는 우리의 기준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역시 독선적으로 진리를 결정짓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종교 다원주의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너무나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네. 너무나 심오하다네. 각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깨달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으나 과연 무지몽매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을까? 결국 종교 다원주의는 지식인들만의 것일세.

민중들에게 있어 종교 다원주의는 그저 초파일날 절에 가서 불공드리고, 부활절에는 교회 가서 예배보고, 병 걸리면 무당 불러서 굿하는 것일 뿐이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전적인 ‘은혜’와는 얼마나 다른가?

장애인이나 무학자나 범죄자나 동일하게 사랑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얼마나 그 ‘격’이 다른가 말일세. 그러한 이유에서 나는 종교 다원주의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네.


글을 마치며

<함석헌 평전>은 그 분량이 두껍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주었네. 그간 ‘삼인’에서 나온 책들을 몇 권 보았지만 하나도 나를 실망시키는 것이 없었다네. 흔히들 김교신과 함석헌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하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의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네. 사상도 달랐지만 삶과 운동의 영역 또한 달랐던 두 사람이야. 다음번에는 김교신 선생의 전기를 한 번 읽어보고 싶네.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 싶고.

언제 한 번 만나세. 다음번에는 우리 둘만 만나서 여러 이야기들을 해 보세나.

구주 대망 이천 일년 가을에

김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