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고전

[임세영 교수의 단테 읽기] 단테 단상

by 안티고네 2001. 6. 30.


인생의 쓴 맛을 보고 어두운 숲속을 헤메고 있던 자리에서 돌이켜 참된 신앙의 길을 발견하였다는 고백의 시편이 단테의 신곡입니다.

우리 몇사람들이 모인 신곡 독서회는 지난 4월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소걸음으로 몇 차례에 걸친 통독을 통한 개관 공부를 거쳐 이제 지옥편 5곡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5곡을 읽은 다음 방학에 들어갔다가 9월부터 다시 시작할 예정입니다.

여기에 우리 독서회에서 나누었던 얘기들을 틈나는 대로 중계해볼까 합니다. 오늘은 처음 독서회를 시작하던 날의 얘기를 올립니다. (임세영.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


<신곡 독서회를 시작하며>

인터넷에 들어가 단테의 신곡에 관한 쓸만한 자료가 있는가 살펴보다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독후감을 접하였습니다.


"신곡이 유명한 책이라고 독서를 권하시는 선생님의 추천을 믿고 신곡을 읽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신곡은 참 좋은 책인 것 같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어느 중학생이라고 밝혀져 있었고, 이것은 잘 못된 독후감의 사례라고 지적되어 있었습니다.

잘못된 독후감의 소재가 하필 신곡인가? 신곡 독서회 첫날 참가한 사람들의 얘기를 차례로 들으며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명의 참가자중 대다수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추천과 소개에 이끌려 신곡 독서를 시도하였다는 것이 이 독후감의 필자와 공통점이었고, 세 쪽에서 중단하였다는 사람, 두 곡을 읽고 중단하였다는 사람, 끝까지 한번 읽기는 읽었지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드라 것도 공통점이었습니다.

단테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이 우리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이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넘어야 할 첫번째 산입니다. 그리고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장벽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장벽은 독서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책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가 스스로 읽는 것입니다. 자기가 읽지 않는 독서도 있는가? 물론 있습니다. 특히 독서회라는 명칭아래 함께 모여 읽을 때 이것이 있기 쉽습니다.

누가 읽으래서 억지로 읽는 것, 매주 또는 격주로 열리는 독서회에 형식상 '성실하게' 참석하여 참고 앉아 있는 것, 필독 고전이라는 소문에 이 책한 권 읽으면 무엇인가 거창한 자랑거리가 되고, 남의 호감과 부러움을 살 수 있으리라는 허영심으로 읽는 것이 자신을 상실한 책읽기입니다.

단테가 위대하다지만 그를 추앙하고 예찬하기 위한 독서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가 빠진 책읽기를 통해서는 필자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한 내면적 성찰에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가 위대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고 진지한 것이 책을 읽는 주체자 '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