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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

[박상익]우치무라 간조, 김교신의 스승(2/5)

by 안티고네 2023. 3. 3.

3인의 우정

이 작은 그룹의 회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치무라에게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니토베와 미야베는 특히 그랬다. 세 사람은 여름방학 동안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성서를 두세 장 함께 읽었다. 룸메이트를 정기적으로 바꿔야 하는 규칙에 반대해 우치무라는 졸업 때까지 미야베와 한방을 썼다. 차분하고 학구적인 미야베는 성미 급한 우치무라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미야베는 졸업 후 도쿄와 미국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삿포로농학교의 후신인 홋카이도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우치무라는 후일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한 『로마서 연구』를 미야베에게 헌정했고, 임종 때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니토베는 언제나 우치무라에게 가까운 친구였으나 미야베처럼 우치무라가 마음을 의지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문학에 매료됐던 그는 학창 시절에는 신경과민으로 늘 초조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도쿄제일고등학교 교장으로서 우치무라에게 많은 학생을 소개했고, 그들은 니토베와 우치무라 두 사람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1881년 7월 우치무라를 비롯한 삿포로농학교 제2기생이 졸업하게 되었다. 입학 이래 줄곧 수석을 지켜온 우치무라가 졸업생을 대표해 작별 인사를 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우치무라, 니토베, 미야베 세 사람은 삿포로의 가이라쿠엔(偕樂園) 공원에 가서 장차 한 몸을 두 J, 즉 Jesus와 Japan에 바칠 것을 서약했다. 졸업 후 우치무라는 삿포로 현의 관리가 되어 수산 업무를 담당했다. 어업 조사를 위해 출장 여행을 하는 한편 수산학의 연구도 병행했다.

초혼 실패와 미국 유학

1884년 3월 28일, 우치무라는 아사다 다케(淺田夕ケ)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에는 우치무라의 부모, 특히 모친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고, 간조도 일시 결혼을 단념할 정도였지만 간신히 식을 올리는 데까지는 갔다. 모친의 반대 이유는 다케가 ‘너무 영리하고 학문이 너무 많고 지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결혼은 반년도 되지 않아 파국을 맞았다.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케의 이성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있었고, 그녀가 ‘양가죽을 쓴 이리’라는 말이 돌았던 것 외에는 오늘날까지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케와 헤어진 후 우치무라는 구약의 「호세아서」를 애독했다. 이혼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우치무라의 죄의식과 신앙, 여성관 등에 끼친 영향을 매우 컸고, 무엇보다도 이 일이 없었더라면 이후의 우치무라의 일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기대했던 기독교적 가정의 붕괴는 그의 마음에 커다란 ‘공백’을 만들었다. 그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우치무라는 1885년 1월 1일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 지적장애인 시설의 간호사로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한 일은 격일로 야간 경비를 하고 하루에 세 시간씩 장애아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간호사 겸 조수로서 지적 장애아동 40여 명을 돌보았다. 아동들의 발을 씻기고 오줌똥을 처리하는 혹독한 체험이었다. 일본 농상무성의 관료로서 전도유망한 엘리트였던 그가 미국 땅에서 어린이들에게 “잽(Jap), 잽”(왜놈, 왜놈)하고 조롱을 받으며, 하루아침에 지적장애 아동들의 배변을 처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이런 경험이 그의 인생에서 갖는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치열한 물음 끝에, “그것이 나의 도덕적 훈련에 도움이 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단순한 자선사업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심령 개발이라는 하늘의 아버지가 주신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칫 멸시당하기 쉬운 그 어린이들에게도 신이 주신 똑같은 영혼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우치무라의 인간관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일본을 떠나 오기 전부터 안고 있던 마음속의 번뇌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다케와의 파경이 우치무라에게 던져 준 문제는 그 문제 자체는 아니었다. 그런 여자를 일시적으로나마 정신없이 사랑했던 자신에 대한 가책이 문제였다. 우치무라는 다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눈먼 사랑에 대해 깊은 자책에 시달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또 친구들에 대하여도 죄를 범했다고 괴로워했다. 이때 우치무라의 자책은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죄의식이라기보다는 피해자로서의 회한으로, 유교적 수치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치무라는 이렇게 이해된 자신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 아동들을 ‘완전한 자기희생과 전면적인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돌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기심이 얼굴을 내미는 것을 자각했다.

실리 총장의 영향

우치무라는 1885년 9월 애머스트대학에 입학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다섯 권만을 가지고 애머스트대학에 도착한 우치무라가 처음 찾아간 것은 실리 총장이었다. 우치무라를 만났을 때 실리의 나이는 61살이었다. 실리는 그 후 우치무라가 귀국하고 나서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하여 1890년에 총장을 그만두고 5년 뒤에는 세상을 떠났다. 우치무라와의 만남이 실리에게는 만년을 장식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하버드대학과 애머스트대학의 비교는 일본의 도쿄대학과 삿포로농학교의 비교를 연상시킨다. 우치무라의 경력을 보면 관군(官軍, 메이지유신 지지파)이 아닌 좌막파(佐幕派, 막부 지지파)의 무사 아들로 태어나, 도쿄대학이 아닌 삿포로농학교에 진학, 미국에서도 하버드가 아닌 애머스트대학을 다녔다. 관군-도쿄대학-하버드대학이 화려한 주류 코스라면, 좌막파-삿포로농학교-애머스트대학은 아무래도 그늘진 비주류 코스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코스를 유유히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치무라가 그 인생에서 후자의 길을 선택하여 걸은 것은,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간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대를 키우는 결과가 된 듯하다. 교회에 대한 무교회의 주창도 이와 같은 대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실리 총장의 우치무라에 대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우치무라는 실리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일종의 이상한 안위를 느끼고 그를 스승으로서보다는 친구로서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참으로 온유하고 참으로 겸손하다. 그를 한번 만나면 백 번의 기독교 증거론을 읽는 것보다 더한 효과가 있다.” 엄격한 동양적 스승이 아니라, 사랑에 뿌리를 내린 기독교적 형제애로서의 실리의 인격에 접한 우치무라는 크게 감동했다. “독수리와 같은 눈과 사자 같은 얼굴에 양 같은 마음을 지닌” 그의 인격에 접해 그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의 조언을 하나님의 조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애머스트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뒤로도 죄의 극복을 에워싼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동양에서 온 가난한 청년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의 내면적 고뇌에 적절한 조언을 준 실리 총장은 어느 날 고뇌하는 우치무라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을 주는 한마디를 해주었다. “우치무라, 너는 너 자신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 되는 거야. 너는 네 밖을 봐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 너는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그 성장을 보려고 매일 그놈을 뿌리째 뽑아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어. 왜 하나님과 햇빛에 맡기고 너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전형적인 속죄신앙을 표현하는 이 한마디가 1886년 3월 8일의 우치무라의 회심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이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생애에서 참으로 중대한 날이다. 그리스도 속죄의 힘이 오늘처럼 명료히 계시가 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부채를 갚아주시고 나를 타락 이전의 최초의 청정함과 결백함으로 되돌려주셨다.” 인간 존재의 변혁은 도덕적 훈련이나 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너의 죄를 구속해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에 의한다는 실리의 말을 우치무라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 회심의 체험은 우치무라의 마음의 세계를 한꺼번에 밝혀주었다. 5월 26일 〈일기〉에는 “새, 풀과 꽃, 태양, 대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라는 환희의 눈으로 본 자연 찬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맛본 회심의 체험은 기독교에 입신한 이후 서서히 형성되던 인간관을 확립해 주었다. 그것은 행위주의, 율법주의와 대조되는 신앙주의에 바탕을 둔 인간관, 가치관이었다. 행위주의 인간관에 따르면 선인들, 부자들, 현자들, 강자들이 존중된다. 반면 죄인, 빈자, 병자, 약자, 어리석은 자는 경시된다. 그러나 신앙 만에 의한 신앙주의 인간관은 선행의 많고 적음을 묻지 않는다. 이 신앙주의 인간관에 설 때 비로소 죄인, 빈자, 병자, 약자, 어리석은 자가 남과 똑같은 인간으로 대접받는다.

‘두 개의 J’

미국에서 지낸 수년간 우치무라에게 이른바 문화적 충격은 크지 않았다. 언어의 부자유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의식주 일체를 서양식으로 제공받았던 삿포로농학교 생활 덕분이었다. 우치무라가 충격을 받은 것은,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의 ‘이교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그를 무엇보다도 경악하게 한 것은 미국의 배금주의였다. 한 식당에 들어가 보이들의 친절한 접대를 받고 감격한 그는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며 식당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치무라의 가방을 빼앗고 ‘서비스 요금’을 요구했다. 우치무라는 미국이 돈을 전능한 힘으로 모시는 ‘배금주의 사회’임을 통감했다. 또한 모두 문을 열어두고 사는 일본과 달리 현관문에서 작은 상자에 이르기까지 마치 도둑의 영(靈)이 모든 대기를 점령하고 있는 듯, 곳곳에 자물쇠를 걸어두고 있는 미국 사회의 상호불신을 보면서 기독교 국가의 비기독교적 현실을 보았다. 또한 인디언과 아프리카인 그리고 동양인에 대한 극심한 인종차별도 그를 실망시켰다. 미국의 맨얼굴을 본 그에게 미국은 ‘이교 국가’ 일본 이상으로 ‘이교적’이었다.

우치무라는 애머스트 시절 기독교와 애국을 결합한 자신의 묘비명을 성서에 영어 문구로 적었다.

I for Japan; 나는 일본을 위해

Japan for the World; 일본은 세계를 위해

The World for Christ; 세계는 예수를 위해

And all for God;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

3년 반 만에 미국에서 귀국한 우치무라는 1888년 8월 니가타의 호쿠에츠(北越)학관 교장으로 부임했다. 우치무라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기독교 학교인 호쿠에츠학관에서 초빙 교섭을 받고 있었다. ‘두 개의 J’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우치무라로서는 이 학교가 추구하는 기독교 교육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부임 후 4개월 만에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이 학교가 외국 선교사의 원조를 받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자유·독립의 원칙을 훼손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교육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우치무라는 경영자, 교사, 선교사들로부터 고립되어 싸움에 패하고 말았다.

우치무라는 외국 기독교, 특히 외국의 특정 교파에 의해 지배되는 기독교를 반대했다. 일본인에게 의미 있는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외국 선교 기관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었다. “기독교의 씨앗은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뿌려졌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고 일본 옷을 입고 일본의 땅에서 성장한 기독교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개의 J’의 신념에 따라 일본인으로서의 독립과 참된 기독교 교육을 관철해보려고 하였으나, 현실의 일본 기독교계는 그의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했다.

칼라일의 영향

우치무라는 1890년 9월부터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현 도쿄대학 교양학부) 촉탁 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제일고등중학교는 그가 어린 시절 배웠던 도쿄영어학교의 후신으로, 이 학교 졸업생들은 대부분 도쿄대학으로 진학했다. 그가 제일고등중학교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어 10월 30일 교육칙어가 발포되었다. 교육칙어는 전통적인 유교 윤리를 열거했지만, 최고의 덕은 ‘충효’에 집약되었다. 궁극적으로 천황을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으로 신격화했으며, 모든 국민은 천황에 대한 멸사봉공의 의무가 있었다.

이듬해인 1891년 1월 9일 제일고등중학교에서는 작년에 발포된 교육칙어의 봉배식(奉拜式)이 새 학기 시작과 더불어 거행되었다. 당시 우치무라는 30살이었다. 교수진 전원과 전체 학생이 모여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를 천황의 초상화 옆에 걸어놓고 그 앞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교장의 연설과 칙어 낭독 후 교수와 생도들은 한 사람씩 단상에 올라가 마치 불단이나 신도의 예식에서 선조들의 위패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처럼, 칙어에 명시된 천황의 서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릴 것을 요구받았다. 우치무라는 세 번째로 등단하였다. 그는 60명의 비(非)기독교인 교수진과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독교적 양심에 따라 그 자리에 선 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우치무라의 입장에서 종교적 예배에 해당하는 봉배(奉拜)는 그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 외에는 절대 바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설사 천황이라 할지라도 지상에 존재하는 자에게 종교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것을 절대시하는 것이다. 인간을 절대시하는 것은 그의 종교적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우치무라가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된 원인은 기독교 신앙과 그의 뚜렷한 개성에 있겠으나, 당시 그가 읽고 있던 토머스 칼라일의 『크롬웰 전기』의 영향도 컸다.

칼라일의 『크롬웰 전기』가 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말을 찾지 못할 정도다. 나는 영국판 책을 중고책방에서 샀다. 때는 1891년, 내가 촉탁 교원으로서 제일고등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나는 이 책을 구매한 후, 모든 것을 잊고 몰두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자유와 독립을 사랑할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것을 절반 정도 읽었을 때 고등중학교 윤리 강당에서 그 당시 발표된 교육칙어를 향해 예배적인 경배를 하라고 당시의 교장에게 요구받았다. 그러나 칼라일과 크롬웰에게 마음을 빼앗겨 도저히 양심에 걸려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권유를 과감하게 거부했다.

상상해보라. 천여 명의 학생과 60명의 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허리를 굽히지 않는 광경을. 우치무라는 당장 표적이 되었다. 그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그가 재직하고 있던 제일고등중학교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서 먼저 나왔다. 그들 중 일부는 우치무라의 집을 습격해서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하루아침에 역적이 된 것이다.

불경사건(不敬事件)

매스컴은 재빨리 이 사건을 ‘우치무라 간조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포장하여 전국에 퍼뜨렸다. 거기에다 불교의 각 종파의 기관지가 편승하여 기독교 신자에 의한 불경사건이라고 떠들어댔다. 그 결과 사건은 확대되어 기독교와 일본의 국체(國體)의 문제로 비화하게 되었다.

우치무라의 이름은 반역자의 대명사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여행하는 동안에는 여관 투숙을 거부당할까 봐 가명을 써야만 했다. 이 와중에 우치무라는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가 2개월 만에 가까스로 회복은 되었지만, 이미 실직자 신세였다. 그동안 우치무라의 아내 가즈코(加壽子)는 박해받는 가운데도 잘 견디면서 우치무라를 간호했는데,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같은 병으로 쓰러져 1891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직장을 잃은 직후에 아내까지 잃게 된 우치무라는 비통함이 극에 달했다.

1893년 그는 『기독교 신도의 위안』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이 있은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이 책 제2장의 제목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였다. 그것은 제일고등중학교에서 있었던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책의 제1장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아내 가즈코의 죽음을 뜻한다.

‘불경사건’은 우치무라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이라고 규정한 천황에 대해, 한 개인이 현세를 초월하는 보편적 존재(하나님)를 근거로 천황의 신성을 부정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관행에 대해 ‘노(No)!’라고 할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준 사건이자, 현세와 지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가 엄존함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은 ‘불경사건’ 후 우치무라가 겪은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일궈낸 종교사상의 결정(結晶)이다. 우치무라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은 이 책에서 거의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을 책장이 찢어질 때까지 애독했다는 일본의 소설가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 1875-1962)는 이 책을 일본 현대문학 최고의 사소설(私小說)로 평가하기도 했다.

1892년 1월부터 우치무라는 교바시(京橋)에 있던 일본 조합교회 강의소의 설교자가 되었다. ‘불경사건’으로 이제는 교직에 종사할 길이 막혀버린 그에게 우선 가능한 일은 전도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해 9월 오사카 타이세이(泰西)학관에 초빙되어 영어와 역사를 담당했다. 타이세이 학관은 조합교회의 학교였다. 타이세이학관은 신임 교사 우치무라 간조를 신입생 모집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오사카아사이신문(大阪朝日新聞)에 게재된 타이세이학관의 생도 모집 광고에는 큼직한 활자로 우치무라 간조가 교사로 부임한다는 선전이 나와 있었다. 그 덕분에 신입생의 숫자도 현저하게 불어났다. 그의 불경사건은 이때가 되면 그에게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명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치무라는 교토의 판사 오카다(岡田透)의 딸 시즈와 일본식으로 결혼했다. 오카다는 오카자키번(藩)의 무사로 궁술에 능한 인물이었다. 딸 시즈를 우치무라에게 시집보내려 할 때, ‘불경사건’ 이야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오히려 우치무라에게 적이 많아서 좋다고 하면서 딸의 결혼에 동의했다. 사위의 인물됨을 알아보는 안목과 대범함이 놀랍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