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를 말할 때 그의 스승 김교신을 빼놓을 수 없다. 김교신의 일기에는 노평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1937년 5월 27일이다.
도쿄 소식. “일전에 쓰카모토 선생을 찾으니 조선인 노 아무개라는 청년이 자기 집회에 오는데 도무지 진실하기 짝이 없다고 보증서를 부치며 칭찬하기에 일단 만나기를 원했는데, 마침 지난 23일 집회 후에 만나보니 물경 노평구 형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면직당하며, 예수 믿는 일을 배우면 학비를 안 주시겠다는 엄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으면 죽고 망하니 믿어야 하겠다고, 오직 믿는 일에만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몇몇 영혼을 지닌 조선도 아직 멸망하지는 않는 줄 알고 감사와 환희에 좁은 가슴이 터질 듯합니다.”
김교신의 지인이 도쿄에서 보내온 편지다. 짧은 글이지만 노평구의 사람됨에 대한 다각적인 평가가 나온다. 먼저 진실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다. 도쿄에 유학 와서 일과 공부를 병행했으며, 고향에서 한의사를 하는 부친이 “만일 도쿄에서 의학을 공부하겠다면 학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영혼을 구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소신을 끝내 꺾지 않고 고학(苦學)을 계속했다는 내용이다. 청년 노평구의 내면은 영혼을 구원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12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노평구의 부친은 한의사였다. 부친은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부친은 한번 역정을 냈다 하면 어린 자식을 혹독하게 매질을 하고는 함경도의 그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서 문밖으로 내쫓곤 했다고 한다. 노평구가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할 때면 어머니는 어린 아들 위에 온몸을 던져 감싸 안고 대신 매를 맞았다고 했다. 엄부자모(嚴父慈母)란 말 그대로다. 그러나 아버지의 속마음까지 엄했을까.
1929년 발발한 광주학생사건은 전국으로 확산하였고, 당시 서울 배재중학 3학년이었던 노평구는 학생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추운 겨울이었다.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아들을 면회 왔다. 쩍쩍 갈라져 피가 흐르는 자식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내가 이러자고 너를 키운 게 아니었는데……” 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토록 엄격하기만 했던 부친의 속마음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노평구의 눈에는 으레 물기가 촉촉해지곤 했다. 그는 이처럼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부친과 한없이 자애로운 모친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훗날 노평구가 일본에서 무교회 전도자 쓰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가 주관한 성경 모임에서 어린 시절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좌중에게 들려주었더니 다들 ‘위대한 부모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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