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버만 지음, 심현식 옮김, <미국 문화의 몰락>(황금가지, 2002)
“미국이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자본으로, 군사력으로, 게다가 헐리웃으로 대표되는 문화 산업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 문명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반미 성향을 지닌 독자라면 반색(?)을 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미국의 몰락을 반가워하기에는 우리 처지가 여유롭지 않다. 우리 역시 거대한 ‘미국화’의 조류에 휩쓸려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이 진단하는 미국 현실은 곧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책의 원제목은 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이다. 직역하면 ?미국 문화의 황혼?으로도 가능하지만 ?미국 문화의 몰락?이 좀 더 임팩트가 있어 보인다. 저자는 고대 로마제국 멸망의 4대 원인을 열거하고, 21세기 미국 역시 같은 원인을 떠안고 몰락하는 중이라고 분석한다. 미국은 4, 5세기의 로마처럼 가장 찬란했던 전성기를 지나 사회적 혼란기로 치닫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버만이 “미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독일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 ?서구의 몰락?이다. 그는 슈펭글러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근거해 미국 문화가 멸망할 것이라는 정황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둘째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회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한 비용투자에 따른 한계이익 감소(사회보장제도의 위기), 셋째 비판적 사고 및 지적 수준의 급격한 저하와 문맹률의 확산, 넷째 소비주의 문화에 따른 정신적인 죽음(문화의 저급화). 21세기 미국은 이미 이 네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다.
첫째, 미국 사회는 1970년대 이후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1947년부터 1973년까지는 빈부격차가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 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비율로 늘어났다. 그러나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실질 소득이 늘어난 것은 상위 20%인 최상위 고소득 계층뿐이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으며, 요컨대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중산층 사회가 아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1997년 IMF 사태를 이후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둘째, 미국의 복지 정책, 특히 사회보장제도와 의료보장제도 역시 위기에 처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 인구가 고령화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까지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75% 증가하게 되는데 반해, 노인 사회보장 정책을 책임지게 될 근로자의 수는 겨우 13%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말에 접어들면 사회복지 수혜자에 대한 노동자의 비율은 일 대 일로 떨어질 전망이다. 간단히 말해 21세기 어느 시점에선가 구조적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저 출산율과 최고의 고령화 속도를 자랑하는 한국은 미국 못지않게 심각한 처지다.
셋째, ‘둔재 생산국 미국’의 참담한 현실이다. 미국 성인의 42%가 세계지도에서 일본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15%는 미국조차 찾지 못한다. 1996년 10월 설문조사에서 대통령 후보가 누구인지 모르는 유권자가 10명 중 1명이었다. 저자는 예전에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의 정신병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대통령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을 상기시켰다. 질문에 대통령 이름을 대지 못하면 정신병자로 간주했다는 건데, 그런 인구가 10% 수준이라는 것이다.
넷째, 상업주의 문화가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정신적 죽음에 이르고 있다. 상업주의가 일상을 지배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 있다면, 저속한 모방과 과장이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과장으로 부풀리고 거짓으로 근사하게 치장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쓰레기와 진정한 가치를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최근에는 조악하고 저속한 것들이야말로 사회에 잘 적응하고 문화적으로도 환영받는 실정이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우스꽝스럽거나 부끄러운 모습이더라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었다.
몰락하는 미국 문명에 대한 지은이의 처방은 무엇인가. 로마가 멸망기에 접어들었을 당시 소수의 수도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적 추세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 문명의 보물과도 같은 요소들을 선정해서 이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지은이는 멸망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의 해법으로 ‘신수도사적 개인(New Monastic Individual; NMI)’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거창한 조직이나 운동을 기대한 독자라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는 해법이다. 하지만 문명이 필연적으로 생로병사를 거친다는 지은이의 순환사관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화 된 문명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서서히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긴 호흡으로 300년, 500년 뒤를 준비하는 것이 후손들에 대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신수도사적 개인은 우리 시대의 사회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우리 문명이 갖고 있는 보물과도 같은 요소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하고, 몰락을 초래하는 요인들을 가려내는 것이 이들이 할 일이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해지는 추세에서는 빈부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던 사회주의 전통이 우리의 보물과도 같은 요소일 수 있다. 기업 위주의 소비주의 가치관이 국민들을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쓰는 소비자로 전락시킨다면, 역사·철학·문학 등 우리 문명의 건강하고 ‘엘리트주의적인’ 지적 전통을 지키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수해야 한다.
수도사적 해법 속에는 전통적인 기술, 남에 대한 배려, 성실성, 학문의 정통성 보존, 비판적 사고, 계몽사상의 지적 전통 등이 포함된다. 그 밖에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 개인적 성취 및 독립적 사고에 대한 가치 부여 등이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모든 본보기들의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싸구려 속물주의, 소비주의 문화, 이익 추구, 권력 투쟁, 명성에 대한 동경, 자신을 드러내기 등을 과감히 배척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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