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권력 서열 1위’인 대통령은 크나큰 비중을 갖는다. ‘5년 임기제 군주정’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영화감독 박성미는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한 정부의 무능한 대처에 항의하고자,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당신이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어느 네티즌이 댓글에서 말했다. “대통령님에게 막말 하지 마세요.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옛날 고사성어에 군사부일체란 말 들어보셨나요. 대통령에게 막말을 하는 것은 자기 부모에게 막말을 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2014년 2월 초순 TV조선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에 응한 한 시민은 “지금 9살인 박지만의 아들(박근혜 대통령의 조카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3세)이 40년 후에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역사학자 전우용은 트위터를 통해 “지루해서 어떻게 40년을 기다리나. 당장 북한으로 가면 될 걸”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3대 세습이 이미 실현된 북한에 가서 살면 될 일이라는 뜻이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도 나오듯이 ‘공화정’이란 ‘군주정’의 반대 개념이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 정치체제를 뜻한다. 그러나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대통령은 마치 여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4년 6·4 지방선거 기간 내내 많은 여권 후보들은 “대통령을 지켜주세요,”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세요”라는 구호로 선거 운동에 임했다.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에 호소한 이 희한한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갈팡질팡 대처로 집권당에 매우 불리한 여건에서 치러진 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뜻밖의 선전을 펼친 것이다. 우리 국민의 눈높이(!)를 정확히 겨냥한 맞춤형 선거 전략이 주효한 셈이다.
영국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은 절대권력을 옹호한 책이다. 홉스 자신도 왕에게 유리한 영향을 주기 위한 의도에서 이 책을 썼다. 홉스에 의하면 권력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 속의 괴물 ‘리바이어던’과도 같아서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압도적 존재였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자연상태의 혼란과 무질서를 종식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당대의 군주들이 무척 반기면서 홉스를 같은 편이라 여겼을 것 같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왕당파는 홉스의 절대왕권 옹호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홉스는 왕권을 단지 ‘기능’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홉스에게 왕권이란 혼란을 막고 질서를 확립하는데 필요한 ‘수단’내지 ‘방편’일 뿐이었다. 하물며 왕권을 ‘괴물’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왕권신수설이 왕당파의 정치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던 시대였다. 17세기 영국의 왕당파 정치인 클라렌던은 이런 논리로 왕권을 옹호할 바에야 차라리 홉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말했다. 홉스의 논리는 군주제가 의존하고 있는 충성심과 경외심을 해체시키는 지극히 ‘불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냉철한 합리주의에 의해 왕권의 종교적 아우라를 말끔히 걷어냈다. 절대왕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양도받은 권력이었다. 홉스에 따르면, 국가 권력은 하나의 거대한 동물(리바이어던)인데, 이 괴물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절대권력은 그 행하는 바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는 전제에서만 유용성을 인정받으며, 권력이란 개인의 안전을 지켜주는 종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홉스는 철저한 공리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였다. 국가권력은 개개인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때만 정당화되며, 그것이 더 많은 개인적 이익을 안겨줄 것이라는 예상이 없이는 개인의 왕권에 대한 복종과 존경의 합리적 기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홉스가 생각한 ‘국가’에는 각자가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개별적 인간만이 존재한다. 이 개인주의야말로 홉스의 정치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근대적 요소다. 개인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서양의 ‘왕권신수설’에 견줄만한 이론이 동양에선 아마도 유교의 ‘충효사상’일 것이다. 300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을 당한 세월호 참사를 두고 최고권자인 대통령의 책임을 따져 묻는 사람에게 ‘군사부일체’ 운운하며 반감을 표시한 네티즌의 태도는 전형적인 충효사상의 발로다. 박정희 3세가 40년 후에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당당하게 펼친 시민은 박씨세습왕조의 충성스런 신민(臣民)이다.
홉스는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를 놓은 정치철학자로 평가된다. 냉철한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로 정치에서 종교적 함의를 배제했다는 의미에서다. 권력은 신비하거나 거룩한 것이 아니다. 수단이요 기능일 뿐이다.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다.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거나 개인에게 이익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주저 앉혀야 하는 게 권력이다.
국민은 권력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국민 개개인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권력은 제거되어 마땅하다. 이것이 ‘근대’ 정치다. 이런 근대적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영국인은 1649년 1월 30일 화요일 아침 런던 화이트홀 밖 처형대에서 찰스 1세의 목을 잘랐고, 프랑스인은 1793년 1월 21일 파리 혁명광장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목을 잘랐다. ‘목을 자른다’는 말은 단순히 해임하거나 축출한다는 뜻의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말 그래도 ‘칼로 베어 자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사전에는 ‘regicide’(국왕살해)란 단어가 당당하게 등재되어 있다. 이것이 ‘근대적’ 시민혁명이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시민혁명을 경험한 적이 없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왕의 목을 잘라본 경험이 없다. 여전히 전전긍긍하면서 여왕님을 떠받들고, 그분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백성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왕조국가 신민다운 사고방식이다. 냉철한 합리주의도 개인주의도 없다. 근대성 결여의 명백한 증거다. ‘그분’은 여전히 ‘군사부일체’와 ‘충효’의 대상이다. 몸은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정신은 19세기에 머물고 있다.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에서 말한다. “아시아인은 왕의 가마 메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동양인에 대한 모독이다. 매우 불쾌한 말이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다. 적어도 한국의 특정 지역에서는 이 말이 아직도 진실이니까. 한국 정치는 언제 중세를 벗어나 ‘근대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의 서양사편력1> 234~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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