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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

김교신과 최재서

by 안티고네 2015. 4. 5.

2015년 4월 25일 '제1회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학술대회'(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발표할 백승종 교수님의 논문에 대한 '연찬'을 맡았습니다. 학술대회라고는 하지만 김교신선생의 삶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목적이 있는 모임인 만큼, 논문에 대한 '토론'보다는 '보론'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같은 내용은 월간 <기독교사상> 5월호에 실릴 "김교신이 오늘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의 일부로 수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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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 근대화’를 향한 김교신의 고뇌: 연찬

 

박상익朴相益(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백승종 교수의 논문은 한국사 연구자가 작성한 김교신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 논문이라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민족주의자’로서 김교신의 사상과 신앙을 포괄적이고도 치밀하게 분석한 이 논문의 논지에 공감하면서, 여기서는 그 엄혹한 시대에 김교신이 일관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각별히 김교신(1901-45)과 동시대를 살았던 영문학자 최재서(1908-64)와 비교해보고자 한다. 최재서가 일제에 굴복하고 조선어와 조선인 됨을 포기한 것은 1942년 봄이었다. 바로 그 무렵 김교신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권두언(卷頭言) ‘조와(弔蛙)’에서 조선의 민족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당했다(이른바 ‘성서조선사건’). 같은 시기에 정반대의 선택을 한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은 비교해볼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김교신과 최재서

 

김교신은 일본 제국의 심장인 도쿄에서 도교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지리박물과로 전과했다. 최재서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강사로 임용되었던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였다(해방 후에는 연세대 영문과 교수).

 

두 사람에게는 일본인 스승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교신이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제자였다면, 최재서는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주임교수 사토 기요시(佐藤淸)의 수제자였다. 최재서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는 한때 유럽의 파시즘 징후를 봉쇄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발레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으나, 1941년 12월8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직후부터 노골적으로 대일협력에 나섰다. 일본 입장에선 ‘전향’을, 조선 입장에선 ‘변절’을 한 것이다. 최재서가 변절 의사를 굳힌 1942년 초 김교신은 ‘성서조선사건’으로 수감되어 만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다.

 

황해도 해주의 과수원집 아들이자 경성 제2고보를 나온 최재서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세계 최강의 나라 영국의 문학을 정통으로 공부한 엘리트였다. 최재서를 비롯해 경성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외국 문학을 통해 찾고자” 했다. 사토 기요시의 경성제대 동료인 일본어문학과 다카키 이치노스케(高木市之助)는 최재서를 이렇게 회상한다.

 

“최재서는 학생 시절 친일파로 간주되어 조선인 학생으로부터 얻어맞기도 했다. 그런데 이 최 군이 어느 정월 휴가에 맥주병을 두 세병 들고 맹렬한 형상으로 밤늦게 내 처소에 와서 ‘선생들이 아무리 협박해도 우리들 조선인의 혼을 뺏을 수는 없어요!’라는 처절한 문구를 늘어놓고 건들건들 나간 바 있다.”

 

비록 나중에 변절을 하긴 했으나 최재서의 내면에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이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제 말기 총독부의 일본어 사용 강제는 그에게 큰 시련이었다. 일제가 일본어 사용을 강제한 배경에는 징병제가 있었다. 일본 각의에서 조선 징병제도 실시요강이 결정되고 이를 공포한 것은 1943년 3월 1일이었고, 학병제를 공포·실시한 것은 1943년 10월이었다. 조선인의 일본어 사용 강제의 일반적 배경은 ‘내선일체론’이었지만,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조선인 징병제였다. 일본인과 함께 조선인이 목숨을 내걸고 적과 싸워야 되는 마당이라면 무엇보다 우선시 하는 것이 의사소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이보다 절박한 것은 없었다.

 

창씨개명이 실시된 1940년 직후만 하더라도 조선 문단에서 일본어 사용 문제는 각자의 취향에 따른 것이 지나지 않았다. 문인에 따라 제각기 선택이 가능했다. 그러나 1942년에 이르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태평양전쟁(1941. 12)이 시작되고 조선인 병역 문제가 닥쳤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10.1.)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는 일본어란 이미 선택사항일 수 없었다. 최재서는 일제의 압력에 순순히 굴복했다. 하지만 그는 논리를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인이었다. 자신의 일본어 글쓰기를 합리화·정당화 할 필요가 있었다.

 

최재서가 ‘일본어=국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은 1942년 봄이었다(‘성서조선사건’ 발생 무렵). 그는 자신이 주간을 맡아 간행하던 종합문예 월간지 <국민문학>(1941년 11월∼1945년 5월)을 1942년 5·6월 합병호부터 일본어판으로 내기로 결정한다. ‘고민의 종자(씨앗)’인 조선어를 버린 것이다. ‘고민의 종자’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최재서는 조선어를 버리기까지 많은 고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주의 비평가 최재서가 전향하게 된 이론적 근거는 ‘국민문학’의 개념 정립이었다. 그는 일본어를 동양의 문화어·국제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최재서는 ‘고대로의 낭만적 도피’를 감행해 ‘일본문학’의 개념을 확대한다. 혜자, 담징, 왕인 등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의 고대국가를 세웠다는 사실은 최재서를 가슴 벅차게 했다. “징병제 발표가 있는 날부터 나는 상대인(上代人, 고대인)을 그리워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조·일 동조동근설(同祖同根說)에 의지했다. 조선민족이 곧 일본민족이라는 신념이다. 최재서는 “논리를 버리고 신념을 획득”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적·시적 낭만주의의 환각이었다. ‘국민’문학은 곧 ‘일본’문학이었다. 조선어를 버리고 국어(일본어)로 나아갈 때 최재서는 더 이상 조선인이 아니었다.

 

변절한 최재서에게는 논리를 저버린 데 대한 보상 심리가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그는 일본어로 쓴 문장으로써 최고 수준에 이르겠다는 야심을 갖는다. 그의 야심은 컸다. 일본 제국이 보장하는 학문·예술·문화의 장(場) 안에서의 투쟁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는 것에 최재서는 자존심을 걸었다. ‘변절’ 지식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야심이었다.

 

김교신의 민족이상

 

1928년부터 양정중학 교사로 근무한 김교신은 1940년 3월 복음 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다가 1940년 9월경 다시 교직에 복귀한다. 복직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취임한 학교는 서울의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교장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가 길을 열어주었다. 이와무라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 출신으로서 김교신의 동문 선배였다. 모처럼 재취임했지만 김교신은 불과 반년 만에 학교를 사임한다. 가장 큰 이유는 김교신이 일제의 동화정책을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김교신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당연히 수업도 일본말로 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끝끝내 조선말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교내에서도 문제가 되어 이와무라 교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학생들 중에도 조선말 수업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김교신은 분명한 태도로 동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생과 대치했다. 진정한 조선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1고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무라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었다.

 

김교신은 일생, 교사시절은 물론, 후일 흥남 공장에 근무할 때까지도 늘 서재에는 대형 한국지도를 걸어놓고 생활했다. 김교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김교신이 늘 지도를 보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증언한다.

 

김교신은 일제의 침략에 유린당한 조국의 비참한 처지 가운데서 자칫 맹목적인 자학에 빠지기 쉬운 다감한 청년들이 우리의 지리와 역사를 통해 민족적 긍지와 포부를 가져줄 것을 소망했다. <성서조선> 제62호(1934년 3월)에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란 논문을 쓴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조선 지리를 지정학적인 면에서 고찰한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 영일(寧日)이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임을 여실히 증거한다.”고 주장하고,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煎) 낸 엑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식민지 조선의 한 구성원으로서 비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이상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분명 최재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식인‧기독교인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땅의 것’을 내려놓은 지사적 그리스도인

 

김교신의 ‘일기’에는 1933년 9월 초순 김교신이 감옥에서 석방되는 공산주의자 한림(韓林, 1900~?)을 마중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김교신은 감옥에서 나오는 한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어 감탄을 금치 못한다. 김교신의 눈에는 ‘유물론자 한림의 당당한 모습’과 ‘조선 기독교인들의 왜소한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비쳤다.

 

김교신이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우치무라 간조 문하에서 성서를 공부하던 무렵, 한림은 와세다 대학에 다녔다. 그는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초대 책임비서를 지냈고, 신간회 도쿄지회 책임을 맡았다. 1928년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되었고, 그 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0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33년 9월에 만기 출옥했다.

 

김교신은 이날 ‘일기’에 “한림 군을 백두산의 거목이라면, 오늘의 기독신자 대다수는 고층건물의 옥상 분재(盆栽)에 불과하다”고 썼다. 신념에 목숨을 건 사회주의자 한림의 당당한 기개에 견주어, 1930년대 조선 기독교는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1930년대는 조선 기독교의 암흑시대라 불린다. 일제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었다. 김교신의 <성서조선>도 계속 간행 여부가 불투명해질 정도였다. 앞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세월이었다. 1934년 9월 12일 <일기>에는 한림이 보낸 편지가 인용되어 있다.

 

“9월 10일 (<성서조선>) 제68호의 성서(城西)통신에 의하면 군(君)은 지난 7월은 꽤 다난다망했던 모양이구나. <성조>지의 속간(續刊) 허가는 잘 됐네. …늦은 대로 축하하네. …<성조>의 속간에 축의를 표하는 일에 군은 약간 의외일지 몰라. ‘무신론자인 내가 종교 잡지의 속간을 기뻐하다니’라고. 물론 이런 면으로 보면 이는 모순이다. 그러나 나의 축의는 딴 데 있다. 설명할 것도 없이, 군의 생애의 사업으로 전 생명을 투입하는 군의 의지 또는 정신―그 선악의 구체적인 내용은 차치하고―을 생각하고서의 축의다. 아 군이여, 철저! 종시일관(終始一貫)! 확호부동(確乎不動)!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 오늘 같은 ‘비상시’에 있어서. 발분하기 바란다."

 

이 편지를 받아 읽은 김교신의 두 뺨에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밖으로는 폐간을 위협하는 일제의 탄압이, 안으로는 무교회주의자란 이유로 기독교회로부터의 조롱과 핍박이 있던 시기에 엉뚱하게도 유물론자의 격려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감회를 남긴다.

 

“모든 기독신자가 무시하고 동인들까지 조롱할지라도 대표적 유물론자 한 사람의 지지가 있으면 족하다. 소위 ‘과격주의자’ 한 사람에게 읽히고 그 비판을 받기 위하여 성조지는 발간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무신론자와 함께 주를 찬송하니 비통한 찬송이다.”

 

<성서조선>이 폐간의 위기에 몰렸던 1940년 6월에는 한림의 집에 초청받아 격려의 말을 듣기도 했다.

 

“1940년 6월 19일(수).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여러 시간 유쾌한 대화를 나누다. 형은 본래 ML(마르크스 레닌)당 사건의 거두(巨頭)지만, 나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가경가애(可敬可愛). 기독교 신자가 안 한다면 자기가 뒷일을 돌봐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기독교 신자가 돕지 않는다면 내가 돌봐주겠으니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라고 유물론자가 격려했다는 말이다. 이념을 뛰어넘어 기독신자와 유물론자 ‘두 거인’을 끈끈한 동지애로 맺어준 공통점은 ‘의기’였다.

 

변절 지식인 최재서와 민족주의자 김교신이 갈라서는 지점은 김교신의 1939년 3월 14일 <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하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진대 내 입에서 설교를 끊으시옵소서. 그 나라보다 더 연모하는 생활이 땅위에 있을진대 한 줄 원고도 이루지 못하게 하옵소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함이 절실하옵거든, 주여, 그 때에 다음 달 호의 원고를 쓰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땅의 것’이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의 방식을 사랑함이다. 물질과 지위에 대한 집착이다. 여기에 지식인의 나약함이 끼어들면 신념을 포기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최재서는 경성제대 최초의 조선인 강사, 사토 기요시의 수제자 등 일제하에서 누렸던 갖가지 명예와 특전을 포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교신 역시 최재서에 못지않게 가진 것이 많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주 예수에 대한 순전한 사랑으로 ‘땅의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끊어낼 수 있었다. 그는 앎과 삶이 일치되는 지사적(志士的) 그리스도인이었다. 유물론자 한림의 표현처럼, 김교신은 ‘철저! 종시일관(終始一貫)! 확호부동(確乎不動)!’하게 전 생명을 투입해 그리스도를 따랐다. 그러므로 김교신은 한국 교회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한국 교회는 얼마나 종시일관(終始一貫) 확호부동(確乎不動)하게 ‘땅의 것’을 내려놓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