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는 요즘 수삼년 뒤에 시행할 연봉제를 위해 교수 업적을 평가하는 기준을 만드느라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교과부는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여, 교수에게 등급을 부여하고, 그 등급에 따라 봉급을 차등 지급하고, 나아가 연금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학에 그 평가의 기준을 만들라고 하명했고, 이에 따라 대학은 그 명을 봉행하고 있는 중이다.
논문의 질과 양을 수치화, 등급화할 수 있을까 |
교수 업적 평가란 결국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될 터인데, 과연 연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대학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어떤 논문이 어떤 논문보다 낫거나 못한 정도를 어떻게 수치화· 등급화 할 수 있겠는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예술 쪽의 논문을 두고 “이 논문의 질은 70점이고, 등수는 30등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논문의 질을 수치화, 등급화 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인용지수를 동원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가능한 분야도 있고 불가능한 분야도 있다.
그렇다면 논문의 양적 생산은 수치화 등급화 할 수 있는가. 큰 범주의 동일한 분야라 해도 쇠털처럼 미세하게 갈라진 전공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여, 논문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각고의 노력을 쏟아도 1년에 논문 한편 쓰기 어려운 분야도 있다. 한편의 논문이 학문사를 바꿀 획기적인 논문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쓴 1백 편의 논문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저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꼭 같은 한권의 저서라도 그 수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흔히 교수 사회는 ‘철밥통 사회’고, 철밥통을 깨기 위해 업적평가와 연봉제로 교수의 연구를 자극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베짱이들이 연구를 열심히 할까? 베짱이들은 연구하고 논문과 저서를 쓰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지만, 살아남는 데는 비범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남들이 학생들 가르치고 연구하는 데 쏟는 시간을 안면을 틔우고 인맥을 쌓는 데 쏟는다. 마당발이다. 대학은 사실상 그들이 쥐락펴락한다. 새로운 제도에도 훌륭하게 적응한다. 논문을 많이 써야 한다면 쓰레기 같은 논문을 대량 생산하여 최우수 교수가 되는 것은 여반장이다. 연봉제와 성과급의 도입은 평소 성실한 교수를 옭죌 뿐, 베짱이들에게는 도리어 좋은 먹잇감을 제공할 뿐이다. |
쓰레기 같은 논문 양산되고, 베짱이들 유리할 것 |
사정이 이런데도 교과부는 양적 평가에 따른 수치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양적 평가는 대량 생산을 요구하는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은 적지만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저작과 논문이 필요한 시대다. 이런 점에서 교과부는 이미 흘러간 물로 방아를 돌리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독창과 개성은 교과부의 강제가 아니라, 연구자의 자발성에서 나올 것이다. 제도로 논문의 양적 생산을 강요하면 자발성은 죽고, 따라서 개성과 독창성이 사라진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냥 두어라. 열심히 하는 교수가 있다면 이런저런 방법으로 격려할 뿐, 다른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학계의 자율성에 맡겨 두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성호 이익(李瀷)은 남인이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경기도 안산의 향리로 돌아가 저술에 전념했다. 다산 정약용은 신유사옥으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간 뒤 학문에 몰두했다. 두 분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독창적이고 탁월한, 호한한 저작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발적인 의지에서 그 저작들을 내놓았던 것이다. 학문은 생물(生物)이다. 강요된 논문, 몇 푼의 돈을 더 받기 위해 아등바등 하면서 써낸 논문이 학문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부디 양적인 업적 평가, 등급제의 시행을 멈추기 바란다.
끝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연봉제와 성과급 등을 그렇게 진리처럼 되뇌는 교과부 관료들은 어떻게 연봉제를 하고 있으며, 어떻게 자신들의 업적을 측정하고 평가하고 있는 것인가. 힘 있는 높은 분들일수록 하는 일의 영향력이 큰 법이니, 그들 역시 성과를 측정해서 봉급을 차등 지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연봉제와 성과급을 하시려거든 교과부부터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