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 외친 김교신이 대표적 제자
우치무라 간조를 배운 한국의 지성들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 | 제160호 | 2010040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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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1901~45·사진)은 함흥공립농업학교 졸업 무렵 3·1운동을 맞아 태극기를 제작해 돌린 일로 일본경찰의 가택수색을 받는 등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떴다. 그해 3월 일본 유학을 떠날 때 청년 김교신의 가슴은 일본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했다. 유학 중 기독교 신앙에 들어간 그는 우치무라 간조 문하에서 1921년부터 7년간 신앙을 배웠다. 김교신은 스승을 가리켜 발톱 끝에서 머리털 끝까지 애국의 화신(化身)이라며 절대적 존경을 바쳤다. 진리 위에 일본을 세우겠노라는 우치무라의 애국심이 자신의 조국애와 서로 통한다고 직감했던 것이다.
종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파악한 그가 택한 애국의 방법은 ‘성서조선’ 발간이었다. ‘성서조선’은 16호부터 동인지 형식을 벗고 김교신 단독의 개인 잡지로 발간되었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독자이자 그의 성서 모임에서 신앙을 배운 인물 중에는 후일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의사 장기려도 있었다. 김교신은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를 역설했는데, 이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의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깨닫고 만든 기독교를 가지고 우리가 겪는 역사적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곧 기독교 토착화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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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용(1904~89)은 충북 영동에서 어린 시절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았을 정도로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자랐다. ‘성서조선’ 동인 6명 중 막내로 스승과의 만남은 3년에 불과했으나 우치무라의 성서 집회를 통해 신앙을 배웠다. 우치무라가 별세한 1930년 ‘성서조선’에 기고한 글 ‘은사 우치무라 간조 선생’에서 송두용은 스승에게서 ‘산 신앙’을 배웠노라고 고백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그 많던 땅을 소작인들에게 헐값에 매각 처분했다. ‘한국의 톨스토이’라는 별명 그대로다.
노평구(1912~2003)는 배재고보에 다니던 1930년 초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하고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학업의 길이 막히자 마포 도화동 산동네에서 빈민 어린이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어느 날 종로에서 서점에 진열된 ‘성서조선’을 발견한 후 김교신을 만나 스승으로 모셨고, 김교신의 권유로 일본에 가서 우치무라의 제자인 쓰카모토 도라지(塚本虎二)와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문하에서 1945년까지 10년간 성경을 공부했다.
광복 후 노평구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뒤를 이어 월간 ‘성서연구’를 창간해 50여 년 동안 500호를 발간했고, 일생 주일마다 종로 YMCA회관에서 성서연구 집회를 주최했다. 김교신에 이어 한국 무교회 운동을 이끈 노평구는 우리 사회를 향상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규정하고, 직설적이고 통렬한 어조로 한국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꾸짖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외형은 커졌지만 콘텐트가 빈약하므로 그 부분을 무교회 진영이 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평구의 제자로는 고려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유희세, 충남 홍성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지낸 홍순명, 고교 교사를 지낸 한병덕, 경북대 교수 박완·진익렬, 한국기술교육대 교수 임세영, 동국대 교수 최정일, 사업가인 전희채 등이 있다. 필자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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