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오늘] 극한의 전쟁터에서 꽃핀 ‘크리스마스 평화’
이 전쟁으로 많은 영국 귀족 가문의 대가 끊길 정도로 전사자가 속출했고, 독일에서는 전쟁 발발 당시 18~22세였던 청년 가운데 37%가 목숨을 잃었다. 회색지대는 사라지고 흑백의 시대가 왔다. 양측 언론은 서로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을 증폭시키면서 이성을 마비시켰다. 영국의 일부 애국주의자들은 독일 개라는 이유로 닥스훈트를 죽였고, 독일에서는 에른스트 리사우어가 작곡한 ‘영국 증오가’가 유행했다. 하지만 증오와 저주만이 전장을 지배한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 구역에서조차 양측이 잠정적으로 특정 임무를 보복의 두려움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1917년 10월 캉브레 구역에서는 병사들이 참호 위에서 저격수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거닐 수 있게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병사들은 노출된 적병을 살해할 기회가 있으면서도 전쟁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종종 이를 거부했다. 이런 비공식적 휴전은 전투가 끝난 후 부상자와 사망자를 거두어갈 때 자주 있었다. 서부전선에서 양측의 우애가 발휘된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14년 크리스마스에 있었다. 전선 이곳저곳에서 프랑스군·독일군·영국군이 자발적으로 참호를 이탈해 무인지대에서 만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담배와 술과 음식과 사진과 주소를 교환했다. 영국군의 한 중대는 독일군 부대와 축구시합까지 했고, 3대2로 승리했다. 영국군 병사 터너는 코닥 카메라를 꺼내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많은 군인들은 적군이 ‘인간’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증오가 분출되는 전장에서 병사들이 만들어낸 크리스마스의 작은 평화였다.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도 모쪼록 크리스마스 정신이 충만하기를.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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