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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출판저널> 2008년 2월호-박상익의 역사읽기

by 안티고네 2008. 1. 6.

 

 

19세기 일본과 중국의 성공과 실패
에드윈 O. 라이샤워 지음, 이광섭 옮김 <일본근대화론>(소화, 1997)

 

19세기 전반 서양인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은 일본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앞선 나라였다. 봉건 영지들의 집합체였던 일본은 수백 년 전 중세 유럽이 경험했던 봉건제를 연상케 했고, 일본은 정치적으로 유럽에 비해 수 세기 뒤져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중국은 오랫동안 고도의 중앙집권적 국가였고 수천 년 동안 관료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근대초기 유럽은 관료제를 통해 봉건제를 탈피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룩했으니 서양인의 눈에 중국이 앞선 나라로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만일 19세기 초 유럽인들이 이 두 나라 가운데 어느 쪽에 근대화 가능성이 더 큰지를 가늠했다면, 중국의 경우는 일부 정책만 조정하면 쉽사리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먼저 철저한 정치적, 사회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오히려 중국이 일본보다 더 큰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빚어졌을까? 일본 태생으로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한 하버드대의 일본사학자 라이샤워(1910-1990)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일원적인 중국, 다원적인 일본


라이샤워는 두 나라의 사회구조와 가치관의 차이점을 넷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그는 두 나라의 대외관의 차이에 주목한다. 중국인은 ‘문명’과 ‘중국’을 동의어로 간주하는 중화사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외부 세계로부터 배울 것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반면 일본문화는 대륙의 지류로서 발달되었으므로 다른 문명국으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서양과의 접촉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발달했던 란가쿠(蘭學)가 그 단적인 예다.


19세기 중국과 일본의 두 번째 다른 점은, 일본이 봉건제 아래 분할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학문과 힘에 대해 중국의 중앙집권제보다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중앙정부는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지방적 반응을 분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따라서 중앙정부를 반대하려면 정부를 전복하는 대중운동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250개가 넘는 봉건 영지로 분할되어 있었고, 비록 그 대부분은 중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충격에 대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일 능력이 없었지만, 그 가운데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등 반응 능력 있는 몇몇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일원적인 중국보다 건설적인 반응의 기회가 훨씬 많았던 셈이다.

 

지위지향형의 중국, 목표지향형의 일본


세 번째는 사회적 유동성의 차이였다. 중국 사회는 이론상 평등주의였고 상당한 사회적 유동성이 있어서, 농민 자제에게도 교육을 통해 정부의 고관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반면 일본 사회는 계급이 분립되어 있어서 상인에게는 상인 이외의 가능성이 없었고, 농민에게는 농민이 되는 것 이외의 가능성이 없었다. 따라서 제한된 활동 범위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바꿔 말하면 중국 사회의 ‘지위지향성’에 비해 일본 사회는 ‘목표지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목표지향성이란 어떤 목표의 달성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이며, 지위지향성이란 업적의 본질보다도 높은 관직이나 사회적 출세에 의해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경향이다.


라이샤워는 19세기 후반의 중국에서는 관계(官界)에서 높은 지위를 추구한 유능한 지도자들의 예를 무수히 들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정부 밖에서 목적을 달성하는데 만족하는 지도자들의 수가 많으며, 어떤 인물은 전도유망한 관직을 사양하면서까지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추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메이지 정부 밖에서 일본 최초의 근대적 교육자로서의 지위를 구축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부케(武家)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상인을 길을 택해 해운왕으로서 명성을 떨친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 메이지 정부의 전도유망한 정치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가 사업가로서 더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근대 실업의 지도자로서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 등을 들 수 있다.


라이샤워는 이렇듯 관료로서 권력을 차지할 기회를 마다하고 다른 형태로 공헌하려 했던 인물을 19세기 중국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청말 산업 개발에 큰 힘이 되었던 솅쉔화이(盛宣懷) 같은 인물은, 관리의 지위에 집착하여 자신의 기업을 정치적 야심에 예속시킴으로써, 오히려 중국 근대화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두 나라의 기업 환경에 큰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새로운 유망사업이 등장하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무거운 조세를 강요하거나 국가 전매사업으로 수용하기 일쑤였다. 그 결과 개인의 자발적 의욕이 국가에 의해 꺾인 채 효율적인 기업 성장을 방해 받았다. 반면 일본의 상인과 부농은 정부 간섭이라는 부담 없이 기업 정신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일본은 금융기관, 교역기관,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보다 앞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봉건적’=‘후진적’?


앞에서 열거한 네 가지 요인 중 뒤의 셋은 봉건제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요인은 유럽의 발전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근대 초기의 유럽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봉건적 다양성과 사회적 분립성 속에서 출현했다. 봉건 유럽에서는 평민이 정부에서 출세하는 데 장애가 있었으므로 사회의 전체적 경향은 지위지향형이 아니라 일본과 같은 목표지향형이었다. 예컨대 상인은 봉건영주가 되려하기보다는 상인으로서 성공하려 했다. 중앙집권적 정부는 비교적 약체여서 근대 초기 유럽은 고도의 기업정신과 장기적 자본투자가 가능했다.


봉건제는 원래 권력분산의 한 형태였던 까닭에, 역사학자들은 한때 봉건제를 부정적이고 분열적인 역사적 요인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또 실제로 오늘날 일상용어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봉건적’이란 말을 ‘후진적’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 일본의 경우를 보면 봉건제가 진보의 한 요인이었으며, 근대 국가로의 성장을 위한 도약의 발판이었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중앙집권적이고 지위지향적인 풍토에 젖어 있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수도권 인구가 전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현상을 보라. 뇌물 공세로 검찰과 관료를 장악하려는 일부 재벌, 권력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목사와 교수들, 권력의지를 공공연히 표출하는 족벌언론사들도 그 생생한 증거물들이다. 오로지 중앙과 권력을 향해 무한질주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우리 사회의 일원성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