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의 계산착오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역, <로마인 이야기 2: 한니발전쟁>(한길사)
기원전 218년 5월 한니발은 코끼리부대를 포함한 대군을 이끌고 에스파냐 남부 해안의 카르타고 세력거점인 카르타헤나를 떠났다. 제2차 포에니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피레네산맥을 넘고 프랑스 남부를 지난 다음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한니발에게는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기원전 264년에서 241년까지 23년간 지속된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는 400년 동안 쌓아올린 시칠리아 섬에 대한 기득권을 송두리째 상실했다. 그것은 지중해 서쪽 바다에 대한 제해권을 잃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 해군이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한 기원전 218년의 시점에서 로마의 방어선은 동쪽, 서쪽, 남쪽이 모두 철벽이었다. 남은 길은 북쪽에서 쳐들어가는 것뿐이었다.
한니발의 이 ‘알프스 넘기’는 모험이기는 했지만 무모한 것은 아니었다. 냉철한 계산을 토대로 실행되었다는 말이다. 프랑스 남부지역은 아직 로마의 지배권 아래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은 로마의 방어선에 들어있기는 했지만 그 방어선은 아직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북부에 사는 갈리아인과 프랑스 남부에 사는 갈리아인은 평소 가축 따위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왕래하고 있었다. 알프스를 넘는 것은 희생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당시 로마인이 생각하던 것처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한니발의 판단이었다.
오디세우스 형 지휘관 한니발
알렉산드로스가 호메로스의 영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한 인물은, 용감하지만 책략과는 거리가 먼 아킬레우스였다. 한니발이 어떤 영웅을 좋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상상력을 펼친다. 한니발은 교묘한 계략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오디세우스를 좋아했으리라는 것이다. 저자의 상상은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의 아킬레우스’인 알렉산드로스는 야습조차도 하려들지 않았지만, ‘오디세우스와 닮은꼴’ 영웅인 한니발은 달랐다.
아무리 한니발이 군사적 천재라지만 원정 출발 시 한니발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이탈리아에 쳐들어갔을 때 한니발의 병력은 2만 6천이었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는 동원가능 병력이 무려 75만 명이나 되었다. 숫자로만 보면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미치광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니발에게는 복안이 있었다. 그는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최대 요인인 ‘로마 연합’의 굳은 결속을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로마 연합’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더 이상 75만 대 2만 6천이 아니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으면서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데 집착한 것은 동맹국의 로마 이반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
한니발은 로마의 ‘아성(牙城)’―로마 시―을 공격하기보다는 우선 아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 해자’를 메울 생각이었다. 전투를 치른 후에는 포로들 가운데 로마 시민병만 잡아두고, 동맹도시 출신 병사들은 석방했다. 한니발의 적은 오직 로마일 뿐, 동맹 도시에는 아무런 적의가 없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로마 연합이 해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비우스와 영국 노동당
한편 로마는 적이 수도를 공격할 위험은 적어졌지만 방위 태세를 다시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로마는 독재관을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전권을 한손에 틀어쥘 독재관으로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취임했다. 그런데 파비우스가 취한 전략은 단 하나, 한니발과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한니발과 싸운 집정관들은 모두 패배를 맛보았다. 파비우스는 자기가 나선다고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한니발을 상대로 싸우면 자기도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마의 장군 가운데 한니발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상태로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한니발에게 지지 않으려면 아예 싸우지 않으면 된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는 적군의 뒤를 바싹 쫓으면서 한니발이 싸움을 걸어와도 절대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놓고 적군이 지치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 파비우스에게는 ‘지구전주의자’(쿵크타토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쿵크타토르가 지구전주의자를 뜻하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고 당초에는 ‘굼뜬 사내’라는 뜻으로 쓰였다.
1883-84년 영국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라는 조직이 창립되었다. 이 협회의 창립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토머스 데이비드슨이었고, 회원으로는 조지 버나드 쇼, 시드니 웹 등이 활약했다. 조직의 목적은 영국에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이비언 협회라는 이름은 로마의 장군 파비우스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페이비언 협회 회원들은 혁명보다는 파비우스 같은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페이비언 협회는 ‘노동대표위원회’라는 별도 조직을 지원했고, 이 조직이 1906년 노동당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란 중에도 땅값은 그대로
파비우스가 택한 전략은 유효성은 인정받았지만 그 때문에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컸다. 로마연합군에는 로마 시민 외에 이탈리아 내 동맹도시 시민도 참전했는데, 그들로서는 자기네 도시가 약탈당하고 불타고 있는데도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한니발에게 특별히 유리한 것도 없었다. 로마시를 제외한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을 약탈과 화공으로 괴롭혀 로마의 열세를 보여주고, 무엇보다도 동맹도시 출신 병사들에게만 온정을 베풀어 고국으로 돌려보냈건만, ‘로마연합’ 가맹국들 가운데 로마를 버리고 한니발에게 달려온 도시는 하나도 없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에 의하면, 한니발에 의해 로마가 포위되었을 때, 로마 시내에서는 한니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토지를 전혀 깎지 않은 가격에 사고팔았다고 한다. 로마를 포위한 한니발은 카르타고 군대의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땅값마저도 전혀 하락하지 않은 채 거래될 정도로 로마인의 사기가 여전한 것을 보고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처럼 로마연합이 정치건축의 걸작이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한니발 세력이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게 되자, 로마는 집정관 파비우스를 북아프리카로 보내 카르타고를 공격토록 했다. 위험에 빠진 자기 나라를 지원하러 가기 위해 한니발은 기원전 203년에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자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소아시아로 도피한 한니발은 기원전 183년경 비시니아의 리비사라는 마을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로마연합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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