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무늬의 역사
미셸 파스투로 저, 강주헌 역,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이마고, 2002), 9800원
아디다스 운동화의 석 줄 무늬, 미국과 프랑스 국기의 줄무늬, 바닷가 비치파라솔의 줄무늬는 대담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반면 병원 환자복, 서커스의 어릿광대와 죄수들이 입는 줄무늬 옷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다 같은 줄무늬이면서도 이같이 상반된 의미가 부여된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지만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던 줄무늬의 역사를 파헤친다. 저자에 따르면 줄무늬가 서양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3세기 중반이었다. 가르멜 수도회 수도사들이 줄무늬 망토를 걸치고 파리에 들어온 때였다. 그때 파리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면서 그들을 경멸했다.
왜 그랬을까? 중세 유럽인의 의식에서 줄무늬는 무질서와 범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중세 프랑스어에서 ‘barrés’는 줄무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잡종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동사 ‘rayer’는 ‘줄을 긋다’, ‘삭제하다’, ‘제외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징계 대상이라는 뜻이다.
중세의 문헌이나 성화(聖畵) 등에 등장하는 줄무늬 옷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배척받은 사람들이었다. 유대인, 이단자, 어릿광대와 곡예사, 문둥이, 망나니, 창녀, 기사도 소설 속의 배신자, 유다 같은 인물들이었다. 모두가 사회질서를 교란시킨 사람들이었고, 어떤 의미로든 악마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었다.
줄무늬 유행의 원조는 미국
중세 유럽인들에게 줄무늬는 곧 ‘다양성’을 의미했다. 중세 라틴어에서 ‘줄이 든 것(virgulatus)’은 ‘다양한 것(varius)’과 동의어로 쓰였고, 이런 동의어 관계는 줄무늬에 경멸의 의미를 더해 주었다. 중세 문화에서 다양한 것은 불순하고 비도덕적이며 기만적인 것이었다. ‘다양함(varietas)’이란 명사는 속임수와 악의적 심술과 문둥병을 뜻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함을 젊음, 관대함, 활발함 등과 같은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중세에 다양함은 죄악과 지옥을 연상시키는 개념이었다. 그런 인식은 동물에게도 적용되어 호랑이, 하이에나, 표범 같이 줄무늬나 얼룩무늬를 가진 동물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피조물이었다. 중세말기에는 얼룩말까지도 잔인한 동물로 취급하면서 사탄의 지배를 받는 동물에 포함시켰다. 중세 기사도 소설에서 영웅은 언제나 백마를 타고 나타나지만, 배신자와 악당과 이방인은 여러 색이 섞인 말을 타고 등장하는 것이 정석처럼 굳어 있었다.
줄무늬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후 14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등지에서였다. 부자와 젊은이들은 엄청난 시련을 견디고 살아난 기쁨을 온갖 종류의 옷에 대한 사치로 풀어냈다. 특히 부분적으로 줄무늬 있는 옷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소매와 견장에 줄무늬 있는 옷이 인기였다. 그러나 줄무늬의 방향이 바뀌어, 당시 배척받던 사람들에게 강요된 가로줄무늬가 아닌 세로줄무늬가 쓰이기 시작했다. 무늬 방향의 변화는 줄무늬 자체에 대한 대중의 경멸을 완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여전히 질서를 위배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세로줄무늬 유행은 곧 시들고 말았다.
그 후 부침을 거듭하며 명맥을 이어오던 줄무늬는 1776년 미국 독립혁명과 더불어 획기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낭만과 혁명을 뜻하는 줄무늬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줄무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신세계에서 시작되었지만 구대륙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중세 이래 부여되었던 경멸의 의미가 퇴조를 보인 것이 줄무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원인이었다. 그 결과 박물학자 뷔퐁(1707-1788)은 중세 이래 부도덕한 동물로 여겨졌던 얼룩말을 가장 균형 잡힌 동물로 꼽았을 정도였다.
줄무늬가 유행하게 된 원인은 1770년대 말의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는 영국을 적대시하면서 미국적인 것에 끌렸다. 미국의 13식민지를 뜻하는 열 세 줄의 깃발은 자유 등 새로운 이념의 상징물로 부각되었다. 이때부터 줄무늬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줄무늬 옷을 입는 것은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급기야 영국마저도 1780년대 말에는 스트라이프(stripe)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삼색기 등 수많은 줄무늬를 채택했다. 줄무늬 옷을 입는 것은 애국자임을 드러내는 행위이자 혁명 이데올로기를 적극 지지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줄무늬 연미복을 착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삼색기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원형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삼색의 아류에 해당하는 국기들이 유럽 각국에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이처럼 프랑스혁명을 기폭제로 줄무늬는 서양 사회 전반에서 가장 즐겨하는 문양이 되었다.
줄무늬의 이중성
그렇다고 줄무늬에서 경멸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줄무늬에는 상반된 가치, 대립된 가치가 공존했다. 18세기 말부터 줄무늬는 가치를 높여주는 상징물인 동시에 가치를 폄하하는 상징물이었다. 그것은 결코 중립적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18세기 말의 사람들이 줄무늬 옷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죄수였다. 프랑스는 특히 죄수들에게 줄무늬 옷을 많이 입혔다. 19세기 초 줄무늬 옷은 영국과 독일의 감옥에서 사용되었고,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 시베리아,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감옥에서도 죄수들에게 입혀졌다.
기하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죄수복의 가로줄무늬는 감옥의 세로 창살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줄무늬와 창살이 직각으로 교차되는 것은 죄수를 외부와 확실하게 격리시키는 감옥의 그물조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줄무늬는 단순한 상징기호가 아니라 장애물이다. 똑같은 줄무늬가 오늘날에도 출입금지선이나 교통표지판 등에서 쓰인다. 요컨대 그것은 장애물인 셈이다.
프랑스어에서 ‘줄을 긋다’는 ‘제외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줄무늬 옷은 입은 사람은 사회에서 배척된 사람을 뜻했다. 그러나 이런 제외가 ‘박탈’이 아닌 ‘보호’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중세 사회가 미치광이에게 입혔던 줄무늬 옷은 경멸과 배척의 뜻이 담긴 기호였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것은 악령에게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창살, 장벽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방어수단 없이 허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미치광이는 악마의 희생양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처럼 옷의 줄무늬가 보호막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파자마가 줄무늬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잠이 드는 순간 무방비상태가 된다. 잠든 동안 악령과 악몽에서 우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는 것은 아닐까? 줄무늬 시트, 줄무늬 매트 역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창살이나 울타리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횡단보도의 줄무늬가 그러하듯 말이다. 역사학 연구의 다양성을 실감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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