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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역사와 문화>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현대사

by 안티고네 2007. 6. 10.

<역사와 문화>(문화사학회) 14호(2007년 9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출판저널> 2007년 4월호에 실린 '박상익의 역사읽기'의 확장판입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현대사

A.랑가네, J.클로트, J.길레느, D.시모네 저, 박단 역 <인간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부키, 2007)


호모 사피엔스의 지구대정복

늘어나는 외국인 체류자, 국제결혼 그리고 혼혈아 출생 등 우리 사회 구성원의 구조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통계 예측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2020년 무렵에 태어날 신생아 3명 중 1명(32%)이 혼혈아가 될 것이라고 한다. 혼혈과 피부색으로 인한 깊은 갈등의 골을 서둘러 치유하지 않으면 국가 공동체의 존립마저 위협 받을 상황이다. 그럼에도 피부색에 근거한 우리의 편견은 쉽사리 바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미국 주류사회에서는 바로 그 피부색 때문에 우리가 편견의 피해자 편에 서야 하는 얄궂은 신세다. 세계 곳곳에서 인류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이 피부색은 대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과연 인간은 피부색이 다른 것만큼이나 이질적인 존재들일까?

 

다행스럽게도 유전학자들이 지구상의 다양한 지역에 살고 있는 현생 인류의 유전자들을 비교한 결과 그 모두가 동질적임이 밝혀졌다. 그러면 이토록 드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도 동질성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 조상들의 생활 조건과 그들의 유전자가 전해진 과정을 시뮬레이션해보니, 오늘날의 인류가 유전적으로 동질적인 이유는 지금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인 선사시대에 우리 조상들의 인구가 멸종의 문턱에 서있을 정도로 매우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 전체로 보면 부모와 자식들을 모두 포함해서 3만 명 정도였고, 그 중 생식(生殖) 가능한 인구는 5천에서 1만 명 정도 되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또는 근동의 국한된 지역―유전학자들에게는 이곳이 ‘에덴’일 것이다―에서 기원전 15만 년에서 10만 년 사이의 시기에 출현했다. 제한된 지역에 워낙 적은 인구가 살았으므로, 에볼라나 에이즈 같은 바이러스가 덮치거나,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닥치면 이들 3만 명은 꼼짝없이 전멸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에덴’ 거주자들이 전 세계로 퍼져 현대 인류를 낳은 것이다. 

 

여기에서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연결고리가 궁금해진다. 일부 연구자들은 중국의 에렉투스가 오늘날의 중국인의 조상이고, 아프리카의 에렉투스는 그들대로 오늘날의 아프리카인의 조상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가설로 반박되고 있다. 그것은 인류가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순간에, 그리고 동시에 여러 곳에서 진화하게 하는 유전적인 내적 구조를 갖고 있음을 가정하는 것으로, 현재의 모든 진화 이론을 거스르는 것이다.

 

현대의 진화 이론은 유전적인 변화가 오직 한 장소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인류의 경우 앞서 말한 ‘에덴’이 바로 그곳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새로운 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작은 집단이 고립된 상태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마존 숲 속에서 건기 동안 어떤 동물의 종이 이전과는 매우 다른 조건에서 밀림의 특정 지역에 고립되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종이 출현한 사례가 있었다. 그 후 기후가 다시 습해졌을 때 그들은 모집단과 서로 교배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돌연변이가 영속화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신속히 고립되어야 한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새로운 종이 고립되지 않고 모집단 사이에 머물러 있으면 그 형질은 도태되어 희미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렉투스에서 사피엔스로의 전이에 대한 오늘날 가장 널리 인정받는 가설은, 여러 지역에 산재했던 에렉투스들 중 각별히 아프리카 또는 근동의 에렉투스들이 진화하여 사피엔스를 낳았으리라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기원전 10만 년경부터 지구대정복에 나서 5개 대륙을 누볐다. 아직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채집자였던 이들은 기원전 6만 7천 년경에 중국을, 기원전 5만 년경에 오스트레일리아를, 기원전 4만 년경에 서유럽을 정복했다. 마침내 기원전 1만 8천 년경에는 인류는 사실상 5개 대륙에 분포되어 살게 되었다. 지구가 완전히 정복된 셈이다.


인류는 모두 하나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피부색이 거주 지역에 따라 달라졌을까? 피부색의 세계분포를 살펴보면 그것이 일조지도(日照地圖)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햇볕이 잘 드는 지역 사람들은 피부가 짙고, 그렇지 않은 지역 사람들은 피부가 밝은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 설명된다. 오늘날 벌거벗은 채 사막에 거주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보다, 아일랜드나 스웨덴 출신의 금발 서퍼들(surfers)이 피부암에 더 잘 걸린다. 그러므로 더운 지방에 사는 밝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은 높은 사망률로 도태되어 후손들이 적어졌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햇빛이 약한 지역에 사는 짙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은 밝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에 비해 비타민 D 합성능력이 떨어진다. 이 경우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은 구루병의 위험에 더 노출된다. 그러므로 선사시대에 추운 지역에서 출생한 검은 피부의 사람들은 구루병에 더 많이 걸렸을 것이고, 세대가 바뀌면서 밝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았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가설이다.

 

인류의 조상들이 대이동을 한 후 피부색이 바뀌는 데는 얼마나 걸렸을까? ‘수 백 세대’ 정도면 확실한 변화가 일어난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은 기원전 2만 년에서 기원전 5천 년 사이에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늘날 캐나다나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사람들보다 과테말라나 콜롬비아에 정착한 사람들이 출생 시에 피부색이 훨씬 더 짙다. 요컨대 피부색의 차이가 고정되는 데는 1만 5천 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부색으로 인류를 구분하는 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으며,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의 과학은 인종(races)이란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인종 연구의 역사는 선입견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인류학자들은 피부색에 따라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 등으로 인종을 구분했다. 19세기 초 혈액형의 존재를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과학자들은 여기에서도 같은 범주를 찾아내고 인종의 존재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일부 나치주의자들은 B형 혈액형이 외국인의 특성을 가진 혼혈의 상징이며, 순수한 아리안족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인류의 대부분은 모든 형태의 혈액형을 고루 갖고 있다. 같은 혈액형은 아니지만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으면서 아파트의 같은 층에 살고 있는 이웃사람의 혈액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같은 혈액형을 갖고 있는 파푸아족 사람의 혈액을 받는 것이 더 낫다. 조직 이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백인 유전자나 흑인 유전자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백인들에게서는 발견되지만 흑인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그런 유전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건만 미국의 FBI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떤 한 사람의 인종 소속, 소위 ‘민족’이라고 불리는 것을 결정하는 유전적 표식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전했지만, 현대인의 이념은 여전히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인의 고루한 미신에 과학의 이름으로 일격을 가하면서 이렇게 외친다. “인류는 모두 하나다.”


국가의 등장은 역사의 퇴보

신석기 시대는 인류에게 막대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변화는 19세기 산업혁명까지, 그리고 아마도 오늘날까지 사실상 우리의 생활방식의 토대와 기초가 되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결정적 변화였다. 인간은 차츰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최초로 촌락들을 세우면서 정착하기 시작했고(기원전 1만 2000년부터), 농사(기원전 9000년경)와 목축(기원전 8500년경)을 생각해내면서 식량을 스스로 생산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변화는 단기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2000-3000년 동안 계속된 점진적인 변화였다.

 

그 후 기원전 3000년경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인들이 문자를 발명했다. 같은 시기에 이집트에서는 인구가 나일강가에 집중되었다. 경제는 항상 농업과 목축에 기반을 두었지만 생활양식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예컨대 동지중해에서 사람들은 궁궐을 건설하고 성벽을 세웠는데, 이는 보다 강력하고 보다 서열화 된, 그리고 끊임없이 보다 전문화된 활동을 하는 집단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식량 생산에서 벗어난 사람들, 즉 금속, 도기, 암석, 가죽 등의 작업만 전담하는 장인들이 나타났다. 또한 사회적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식료품을 재분배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상층부의 권력자가 등장했다. 국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등장과 더불어 인류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인류의 진보인가.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불평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구석기 시대 사냥꾼-채집자의 작은 무리들 사이에는 다양한 연대 관계가 있었다. 사냥꾼은 짐승을 사냥할 특권을 가지며 그의 동료들에게 사냥한 고기의 일부를 제공했다. 분배는 필연적인 것이자 안전보장을 의미했다. 즉 내일은 누군가가 그에게 사냥한 고기를 다시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필요를 일정하게 만족시키는 데 유의하는, 연대 책임이 있는 사냥꾼 공동체는 지나친 불평등을 낳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초의 촌락공동체들에서는 생산량의 증대와 더불어 불평등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신석기 시대는 인간이 어떤 점에서는 자연을 이겼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상실한 시대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신석기 시대가 일종의 퇴보의 시대였다고 주장한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식물과 동물들을 길들이고 자연과 싸워 이겼다. 이러한 지배는 그들을 도취하게 하고 그들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어서 판단을 흐리게 했다. 그들은 경쟁의 경험을 갖고 있었고, 스스로를 승리자, 정복자로 여겼다. 또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지배를 동족들에게도 적용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인류가 항구적인 진보 상태에 놓여있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그런 통념은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는 점에서 인류는 분명 진보했다. 그러나 가치와 도덕적 행동이란 점에서, 그리고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인류는 향상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인류의 생존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우리의 지구를 거칠게 마구 다루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기를 원했지만 실은 그것을 궤멸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이 토지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지만 질문을 받은 이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에게는 토지 소유의 개념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에서는 인간은 토지에 속해있고 동물이나 식물들처럼 그 구성요소일 뿐이었다. 이 책은 그들의 개념이 윤리적?심미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가지며, 오늘날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사적 소유에 대한 개념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평가한다. 루소의 자연관을 연상케 하는 이 같은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현대 문명의 미래에 관한 진지한 성찰로 이끈다.


우리 시대는 신석기 시대와 맞닿아 있다

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는 문자 사용여부를 기준으로 한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의 구분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런 구분법에는 우리 시대가 선사 시대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저변이 깔려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우월감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단정한다. 문자는 실체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문자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증거를 남겼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능력이 문자가 사용되기 전에도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300만 년 전부터 존재해왔지만, 그 중 299만 년 동안 사냥꾼-채집자로서 살아왔다. 신석기 시대의 변화는 고작 최근 1만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진행되었고, 우리가 역사 시대라 부르는 시기는 기껏해야 수 천 년이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우리만큼이나 영리하고 창의성이 풍부했다. 그들은 이미 계절의 순환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월상(月相)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과일이 어느 때에 익고, 순록이 어디로 옮겨갈 것인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고, 미리 예비하고, 세계에 대해 사색할 수 있었다.

 

최초의 정착민들은 이 모든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한층 끌어올린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변화는 기원전 1만 년 경 정주생활과 더불어 일어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틀을 규정하는 모든 것―복잡한 사회?문명?권력 등―을 연쇄적으로 생성시켰다. 그러므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신을 갖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 시대는 신석기 혁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고학적 유물들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보석, 장신구, 무기, 유혹, 권력에 대한 태도, 외양에 대한 관심 등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 우리가 오늘날 신석기 시대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다르게 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기원전 5000년경 도나우강가의 대농장에서의 생활과 18세기 앙시앵레짐 기 프랑스 농장에서의 생활 사이의 차이점이라고는 쟁기, 제분기 등의 몇몇 농업기술 말고는 없다. 신석기 혁명의 핵심적인 양상은 19세기 산업혁명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신석기 시대는 인류 역사의 원천이다. 세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시기인 것이다.


낙원 상실의 역사

신석기 시대는 또한 도처에서 농업이 자연을 대체한 시기이기도 했다. 지구는 완전히 정복되었고 야생의 세계는 제한되었으며 자연은 굴복 당했다. 1만 년 전 이래로 우리는 신석기 시대의 혁명을 상징적으로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정복 활동을 거듭했다. 정복의 주체는 물론 ‘인간’이지만, 좁은 의미로는 ‘남성’이다. 남성은 신석기 시대의 정신, 즉 승리자?정복자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복종시키고 물질을 극복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같은 종인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감정을 맛보고 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 사물에 대한 지배력이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력으로 전이된 것이다.

 

인간은 처음 씨앗을 뿌리면서부터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노동을 시작하면서 부와 잉여를 창출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피라미드 사회를 만들었으며 구속을 강화했다. 그러므로 신석기 혁명은 부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인간은 그가 창조한 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는 승리자이지만 동시에 희생자이기도 하다.

 

구석기 시대는 풍요의 시대였다. 우리의 사냥꾼 조상들은 사냥하는데 고작 몇 시간을 할애했을 뿐이며, 그들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양의 음식을 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상의 낙원이었다. 그 후 기나긴 쇠퇴의 시작인 신석기 시대가 왔다. 이 시기는 도덕적 타락과 에덴에서의 추방을 상징한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해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구약성서의 한 구절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신석기 시대는 오늘날까지 중단 없이 승리해온 한 과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 대가를 치렀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각각 반대급부를 가져왔다. 예컨대 자연에 대한 승리는 환경 문제로 인한 새로운 긴장을 유발시켰다. 안락함을 얻기 위한 행보는 새로운 고통을 수반했다. 획득된 자유 하나하나는 새로운 구속에 의해 대가가 치러졌다. 이렇듯 행복과 불행, 선과 악, 현명함과 어리석음은 우리 인류라는 종이 갖고 있는 한 쌍의 본성이다.

 

현대사 전공인 역자는 ‘옮긴이의 글’에서 20세기사 전공자가 까마득한 고대를 다룬 인류학 책을 직접 번역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와 우리 시대의 동시대성을 역설한 저자들의 입장을 감안하면 역자가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역사와 인간본성을 긴 시간의 조망 속에서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얇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을 평이한 문체로 옮겨준 역자의 노고에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