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출판저널>2006년 10월호 이 달의 책 후보(3권)
《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검둥소| 208쪽 |값 9,000원
기지촌 이야기는 불편하다. 교장선생님이 절대로 혼혈아를 대표선수로 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축구 실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조재민이 후보 선수를 면치 못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읽는 이의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그가 학교에서 동네에서 집에서 늘 개밥의 도토리처럼 겉도는 신세인 것도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나도 그 공범자가 아닌가 하여…….
주인공 김정원은 그런 재민을 보면 명치끝이 아팠고, 그가 안타까워 안아주고 싶었다. 정원의 편견 없는 고운 마음을 재민이 모를 리 없다. 헤어지기 전날 재민은 말한다. “김정원, 그동안 생각해봤는데 너만큼 친한 친구가 없었어. 미국 가면 너밖에 생각 안 날거야.”
우리나라에서 2020년 무렵에 태어날 신생아 세 명중에 한 명은 혼혈아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혼혈과 피부색깔로 인한 깊은 갈등의 골을 서둘러 치유하지 않으면 국가 공동체의 존립마저 위협 받을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누군가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 누군가와 동무가 된다’고 믿는 김중미는 인종, 신분, 성과 직업의 차별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만이 그 해답이라고 말한다. 삭막한 이 시대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박정자 지음|기파랑|280쪽|값 12,000원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흥미롭다. 현대사회의 소비는 소비자가 주체가 되어 상품(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유명 광고 모델(매개자)이 쓰는 것을 따라가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욕망에는 전염성마저 있다고 한다. 정당의 정강정책(대상)보다는 정당의 지역성(매개자)을 보고 투표권을 ‘소비’하는 한국 유권자들의 ‘지역감정’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 듯싶다.
귀족적 품위를 뜻하는 'distinction'은 차별, 구별을 뜻한다. 귀족이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차이’이지 ‘재화’ 그 자체가 아니다. 부하 직원이 외제차를 타면 자신은 소형 국산차를 사용함으로써 차별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준다. 아래 계층과 구별되는 차이의 효과 그 하나이고, 돈 많은 사람이 소박하고 겸손하기까지 하여 서민에게 친근감을 준다는 것이 그 두 번째이다. 그렇다면 거부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만나 10달러대의 검소한 식사를 한 것도 과소소비(under-consumption)를 통한 차별화 시도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서울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서울대 폐지론 주장자들을 한국의 ‘주류’로 간주하는 것은 생뚱맞다(119쪽). 이 같은 인식 오류는 ‘지적 반(反)소비현상’일까(103쪽)? 아니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일까(187쪽)? ‘잃어버린 10년’에 방향감각을 잃은 이 시대 ‘주류’ 지식인의 어지러운 내면의 일단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미덕도 덤으로 갖춘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엮음|역사비평사|328쪽|값12,000원
유럽인은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을 자기네와 가까운 지역이란 의미에서 근동(Near East)이라 불렀고, 자기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동쪽지역을 극동(Far East)이라 불렀다. 근동, 극동이란 말은 철두철미 유럽인의 시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에서 동쪽을 대상화, 타자화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극동’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쳐보자. 극동방송, 극동문제연구소, 극동건설, 극동대학교, 극동해운…….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이름이 지금도 너무나 당당하게 사용되고 있다. 자아정체성, 민족주체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언어는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건만.
한국고대사의 시대구분용어인 ‘삼국시대’란 말도 엄연히 우리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야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사국시대’로 불러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도 마찬가지다. 발해도 엄연히 우리 역사인 만큼, 통일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남북국시대’로 고쳐 쓰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먼저 우리 안을 들여다볼 일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