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읽기

백원짜리 동전의 가장자리가 오톨도톨한 이유는?(2):중세 말기 신학자들의 납 주화 이론

안티고네 2000. 4. 27. 00:36



두 개의 신학이 인간 본성에 대해 매우 상이한 이해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 본성은 약하고 타락하고 무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게 인간 본성은 자율적이고 자기충족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볼 때, 구원을 위해서는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신은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행할 것인지 만을 지적할 뿐, 인간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은 상태로 방치해둔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구원은 공로 없는 선물이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게 구원은 인간이 정당하게 얻은 보상이었다.

서유럽 교회에서 벌어진 이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정통으로 인정되었고,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비난을 받았다. 두 개의 중요한 종교회의, 즉 카르타고 종교회의(418)와 제2차 오렌지 종교회의(529)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교회의 규범으로 확립했다.

그후 펠라기우스적(Pelagian)이란 말은 "인간의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신의 은혜를 충분히 믿지 못하는"이란 의미를 갖는 경멸적인 술어가 되었다.

중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서기 5세기의 교부 시대 이야기로 나무 길게 빗나가고 말았다. 다시 중세 말기의 스콜라신학으로 화제를 돌리기로 하자.

14, 15세기의 스콜라신학자들 중 이른바 근대주의(Via Moderna)에 속한 학자들은 펠라기우스와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의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의인은 선행에 의한 것이지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선행이 신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보상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의무를 지워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펠라기우스에 비해 훨씬 정교한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자신들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동시대의 경제 이론에 근거하면서 자신들이 결코 펠라기우스와 같은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중세 말기 경제이론 원용은 어찌나 용의주도했던지, 우리는 이를 통해 중세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적 주장을 펼치기 위해 사회적 맥락을 얼마나 기꺼이 이용하려 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활용하려 했던 경제 이론이 바로 이 글 첫머리에 설명했던 납 주화 이론이다.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이 펠라기우스를 추종하고 있다는 혐의를 반박하기 위해 납 주화의 사례를 들었다.

그들은 인간의 선행을 과장했다는 비난에 대해, 자신들이 전혀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선생은 납 주화와 같아서 본래적 가치는 전혀 없다. 그러나 신은 계약을 통해 인간의 선행을 실제 이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것처럼 취급하기로 정했다. 그것은 마치 왕이 납 주화를 금화처럼 취급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분명 인간의 선행을 구원을 구매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가치를 갖는 "금"처럼 취급했지만, 근대주의 신학은 인간의 선행을 "납"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선행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신이 은혜롭게도 인간의 선행을 실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처럼 취급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주화의 본래적(inherent) 가치와 부여된(imposed) 가치 사이의 차이점을 신학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펠라기우스를 추종한다는 비난을 교묘하게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선행이 구원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입장에 선 신학자들, 즉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보는 신학자들의 맹렬한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신학자들을 근대 아우구스티누스학파(Schola Augustiniana Moderna)라고 부른다. 그들은 근대주의 신학자들을 "근대판 펠라기우스"라고 비난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으로 복귀하는 신학 이론을 개진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은 여러 면에서 이러한 신학적 전통의 후계자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끝)



렘브란트 <예루살렘 파괴를 한탄하는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