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번역

[펌]번역은 반역인가...눈물이 났다.

안티고네 2006. 4. 28. 10:38

다소 도발적 제목을 가진 탓에, 처음엔 이 나라의 개판 오분전인 번역에 대한 비판서인가 했습니다.
그러나 읽어 본 뒤,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 책은 이 나라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혹은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할 필독서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번역의 문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번역 문제 뒤에 숨겨진 "매춘교수"-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들과 그런 교수밑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질질 끌려다는 대학원생들. 돈이 되지 않는다고 인문서적 출판을 기피하는 출판사들. 번역을 천한 일로 여겨 제대로 된 대접을 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소위 엘리트 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중성. 남의 고생한 결과물을 날로 먹으려 드는 도서관들.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만 바라본 체, 투자에 인색한 정부.
이 모든 요소들이 결국 이 나라의 인문학을 망가트리고, 인문학을 빈사에 이르게 한 주범들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라는 것은 단순히 외국어로 된 것을 우리말로 옮겨놓는다는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우리만의 창문을 만드는 행위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저자 스스로가 인문학자이며 번역자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그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대목은 모국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즘 영어공용화를 이야기하는 정신나간 양반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이야기이자, 모국어가 바탕이 되지 않는 번역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번역한다고 되지도 않는 모국어를 함부로 굴려댄 제 스스로에 대해 많이 반성했습니다.
실로 무식유죄, 유식무죄(無識有罪, 有識無罪) 라는 저자의 말이 폐부를 찌르더군요. (무식해서 죄송합니다.... ㅜ.ㅜ)

책 내용 한자한자 마다 진정 우리나라 인문학의 처지와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서 보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불편했습니다. 앞으로 이 분야를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이나 현재 공부하고 계시는 분들이 제발 한번 쯤 읽어보고 깊이깊이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대단히 사적인 감상문입니다.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내 최종학력은 대졸이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3년을 넘게 공부를 했지만, 나는 논문을 내지 않았다.
아니, 논문을 내지 못했다는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내 최종학력은 대학원졸이 아닌 대졸이다.

고등학교때 "나는 꼭 역사학자가 되겠어"라고 결심한 이래, 거의 10여년의 세월을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매달린 길을 나는 중도포기했다. 패자에게도 변명이 있듯, 나에게도 몇 가지쯤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내 안에 타오르던 학문을 향한 열정(이렇게 쓰고보니 엄청 대단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다.) 이 어느날 완전히 식어버렸던 데 있었다.

그건 정말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자,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최우선으로 여기던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이상 중요하지도, 가치있지도 않았다. 굴러다니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변해버렸고, 세상은 나에게도 변할 것을 강요했다.

심지가 굳지 못한 나는 이런 현실에 그만 심하게 절망해버렸고, 모든 것을 놔버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그때의 열정적이던 나와는 백만광년쯤 떨어진 "내"가 되었다.
더이상 그때처럼 생각하지도, 꿈을 꾸지도 않는다.
그건 정말 한때의 꿈이었고, 이상이었고, 내 전부를 건 그 무엇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이 작은 책이 이미 내 안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믿었던 그 무언가가 아직 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깨우쳐주었다.

눈물이 났다.

내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안에, 아직 무언가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고맙고도 또 고맙다.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쯤 앞날이 보인 것도 같아서.
아직 저 심연에서 끌어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책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
참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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