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출판저널>2006년 5월호 이 달의 책 후보(3권)
5월부터 <출판저널> '이달의 책' 선정위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출판저널> 편집부에서 신간 중 10여 권을 뽑아주면
거기에서 마음에 드는 3권을 가려서 간략한 리뷰를 쓰는 일입니다.
5월호에서는 다음 세 권을 선정했습니다.
<출판저널>2006년 5월호 이 달의 책 후보(3권)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 현암사 | 976쪽 | 값 38,000원
원로 서양사학자 노명식은 20세기 한국현대사에서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은 함석헌 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함석헌이 평생 ‘선생님’이라고 부른 단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다석 유영모이다. 두 인물 모두 ‘외래의 목소리로 나를 말하지 않고 제소리를 만들어낸 한국 사상가’라는 평을 듣는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그러나 함석헌과는 달리 유영모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남긴 글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은 1935년에 쓴 글에서 유영모가 고귀한 사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글로써 표현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심한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위대한 사상가이면서도 가슴에 품은 뜻을 글로 써내지 않는 것을 두고 ‘물질적 수전노보다 더 심한 어른’이라고 원망 섞인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김교신에게는 유영모가 ‘정신적 수전노’로 비쳐졌을 법하다. 텍스트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리라.
그러자 제자들이 묘안을 짜냈다. 1956-7년에 걸쳐 행한 일련의 강연을 속기사를 동원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강연이 행해진지 반세기가 흐른 2006년, 제자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속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훌륭하게 정리되었다. 속기사를 동원하기로 한 제자들의 간절한 마음, 무려 반세기를 묵혔다가 이제야 책으로 풀어내기까지 제자들이 겪었을 심려와 노고를 국외자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유영모는 한글을 하나님이 세종대왕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신 계시라고 생각했다. 한글은 진리의 구현이며 한국어는 하나님의 진리가 담긴 도구였다. 그는 한국말에는 진리의 빛이 언제나 빛나니 금강석을 다른데서 찾지 말고 우리말에서 찾는 것이 조국사랑이라고도 말했다.
과문의 탓인지 모르나, 일찍이 과학성, 합리성을 이유로 한글을 예찬한 사람은 여럿 보았어도, 한글의 위대성을 사상과 종교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찬양한 인물은 유영모 말고는 본적이 없다. 한국말에 대한 지고한 사랑으로 전개된 유영모의 사상은 우리의 정신에 깊숙이 뿌리 내린 진정한 한국 사상이다. 모국어의 보석상자로서 두고두고 후손들의 자랑거리가 될만한 책이다.
《장미와 씨날코》 김진송 지음|푸른역사|380쪽|값 15,000원
1959년 한 해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기붕 가 출입인 명부를 통해 재구성한 책이다. 4.19혁명으로 끓어올라 폭발되기 직전의 흐물흐물 썩어문드러진 한국 사회 구석구석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역사상 경천동지의 대파국을 맞이하기 직전의 사회에서 종종 표출되곤 하는 ‘시대의 징조’를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자유당 시대를 경험한 기성세대는 씁쓸한 감회와 함께 ‘허허, 저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우리와는 동떨어진 낯선 미개 사회를 들여다보는 듯한 생경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후반부에서 일대 ‘반전’을 시도한다. 1959년에 목격했던 추악한 과거의 광경들을 오늘의 현실에서도 아주 실감나고 생생하게 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할 말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역사의 질기디 질긴 연속성을 확인한 셈이다. 과거를 현재의 타자로 만들고 싶어 했던 저자, 그리고 저자의 시도에 편승하려 했던 독자들의 기대는 좌절로 끝난다.
과거의 참담함은 현재의 참담함이며, 과거를 향한 분노는 현재를 향한 분노일 수밖에 없다. 과거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나의 현실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과거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듯이, 현재로부터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도 함께 ‘쓴맛’을 보자고 권유하려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몫일 것이다.
《활을 쏘다》김형국 |효형출판|264쪽| 값15,000원
국궁을 소재로 우리 역사와 문화와 현실을 흥미롭게 짚은 책이다.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가 뛰어나단 얘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조대왕이 태조를 능가하는 명사수란 대목이 신선하게 와 닿는다. 50대를 쏴서 50대를 다 맞출 수 있는 실력임에도 겸양의 뜻으로 한 대를 일부러 빗나가게 쏘았다니 조선에 저런 왕도 있었던가 싶다.
인마살상용이 아닌 화살로 효시(嚆矢)가 있었다고 한다. 살촉 대신 청동 또는 뿔로 만든 소리통을 달았는데, 거기 뚫려있는 구멍이 공기의 저항을 받아 소리를 내기 때문에 신호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사냥 또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용도인지라 효시가 ‘시작’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사(史)는 활쏘기에서 적중수를 헤아리는 사람이었고, 목적(目的)은 과녁에 시선을 집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활에서 유래된 한자말은 이외에도 부지기수이다. 유사 이래 활이 얼마나 동아시아인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과녁의 사각형 안에 빨간 원을 그려 넣었는데, 일제가 일장기를 닮았다며 그걸 쏘는 것은 불충이라고 호통을 치자, 붉은 원 바깥에 검은 사각형을 칠해 일제의 질책을 피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과녁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국궁을 2003년부터 취미로 시작했다는 저자는 대단히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본시 쉬운 글을 어렵게 쓰기는 쉬워도 어려운 글을 쉽게 풀어쓰기는 어려운 법, 저자의 글쓰기 내공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렇게 보통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간결한 글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지 싶다. 즉 역설적이게도 저자가 활쏘기 초보자이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수들은 오히려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의 가려운 데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첫 장을 펴들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