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 선생

<노평구전집> 생명의 절대성

안티고네 2001. 7. 17. 11:53

우인(友人) 최운걸(崔雲杰) 씨로부터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아기가 죽고 말았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최 형의 아기 이름은 정산(貞山)입니다. 1월 18일에 태어나서 2월 24일에 죽었으니 지상의 생애로 하면 40일도 못되었습니다. 나는 장례 일자도 알고 있었으나 최 형 부인께서 교회에 출석하고 계신 관계로 일부러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나 자신의 부덕한 소치인데, 최근 목사님들을 대하면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서 되도록 공석에 나가는 것을 피하기로 작정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최 형은 그간 가정에서의 신앙 문제에 대해 여러 모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목사님의 출석도 없이 형 부부가 자녀들을 데리고 고독한 중에 아기의 장례식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나의 심중에는 나 자신에 대한 심한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 분노는 최 형 부부에 대해 실례를 저질렀다는 이유 정도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네가 정산 양을 무시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질책이었습니다. 과연 나는 정산 양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아마 나의 가까운 친구의 연장자의 상사(喪事)였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얼굴이라도 내밀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하여 나는 3월 10일 주일 모임에서 대충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정산 양을 추도하는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을 아래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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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날마다 신문 지상에 게재되는 수많은 부고를 보면, 모두 국회의원이요, 박사요, 문사요, 배우요, 선수요, 그리고 이런 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사람들뿐이지, 어린아이의 부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서는 이는 당연한 일로서, “신문 지상에 어린아이의 부고가 없다 하여 불평하는 것이야말로 정신병자의 말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대해 항의하고 싶은 것은, “그래, 국회의원이나 박사나 배우나 선수만이 사람이고, 어린아이는 사람이 아니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과연 그렇게 그의 지상에서의 문벌과 나이와 명예와 지위와 사업과 재산과 학문, 미모, 건각(健脚) 등으로 평가될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세상에 태어나 한 달 밖에 살지 못한 정산 양, 추운 겨울에 방안에서 바깥세상도 구경 못하고, 어머나 젖만 빨다가 죽은 정산 양은 정말 아무런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와 고귀성, 존엄성은 절대로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 자체의 절대성, 고귀성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며, 형제를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일견 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이 사람 자체의 고귀성 때문입니다. 그가 “거룩한 안식일 제도도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고 한 것 역시 이 사람 자체의 절대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어린 아이 중 하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나이 먹은 것으로 따지자면 돌덩이도 사람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뜀박질로는 손기정 씨라 해도 개를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과연 쇠붙이보다도 못한 존재이며, 고대광실로 만족하는 자들, 저들은 과연 나무토막만도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는 “솔로몬의 영화도 들꽃 하나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요즘 서울 시내에서 우치무라 간조 전집(內村鑑三 全集)이 15만환이나 간다고 합니다. 과연 우치무라 자신보다 전집이 더 유명하게 된 모양입니다 우치무라의 신앙을 반대하는 자들도 모두 이 전집만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그들의 인생은 사업이요, 돈이요, 사상이요, 명성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망령들은 순례자 단테를 향하여 지옥의 명성이라도 좋으니 기어이 세상에 나가거든 자기의 이름을 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사이 목사는 교회당 청부업자로 타락했습니다. 교육도 수지맞는 사업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성장해도 신앙은 없습니다. 학교는 커가도 교육은 없습니다. 사람이 사업과 지위와 명성과 재물과 학문 밑에서 압사당하고 희생당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가 그러하니 국가나 민족 같은 것은 더욱 문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문 지상에 게재되는 그들의 부고는 부의금 모집 공고이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이들은 죽어서 자기의 시체마저 팔아먹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철저히 명성과 돈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아기의 죽음은 그 죽음이 어리면 어릴수록 얼마나 깨끗합니까? 오래 살고 많은 일을 했다고 인생이 위대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대사(大事)에 대악(大惡)이 따릅니다. 아니, 사람의 모든 가능성은 아기에게도 벌써 다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천재는 요절한다고 했으며, 그것은 또한 신의 축복이라 했습니다. 이가 또한 세상에 천재가 드문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기의 죽음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점 예수의 아기에 관한 말씀에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는 “누구나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어린아이는 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놀라운 선언인 것이며, 과연 믿음과 하나님 나라의 깊은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는 절대적이라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포함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은사로서, 사람 편에서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아무런 타산 없이 그저 무조건 이를 받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태도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른들은 욕심과 타산에서 우정 관계나 천륜 관계까지 그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세계에는 이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들은 이 근본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참고 달게 받을 줄 압니다. 아니, 이 근본적인 관계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전부인 것입니다. 어머니면 그만입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과연 그대로 생명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은, 모든 것을 거저 요구하고, 거저 받고, 또 갚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주는 것보다 받을 줄 아는 것이 더욱 위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타산이 없고 공덕(功德) 관념이 없습니다.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그저 “네, 네, 고맙습니다, 좋습니다, 더 주십시오,” 그리고 순종뿐입니다.

과연 이야말로 인류가 창조주, 전능자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 그대로가 아닙니까? 작년 저의 애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여러 시간 혼수상태에 빠져 생명이 위독할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부르라 했습니다. 평소 종교 교육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큰 소리로 여기에만은 곧 응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의 위대는 생명에 있다 했습니다. 육체에 있지 않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죽음을 다만 생리적인, 육체적인 원인으로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연 의약은 절대적으로 병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생명 창조의 주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죽음에 대해 인간적인 슬픔이나 비애가 아주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최선을 믿어야 합니다.

아기의 죽음은 그 자신에 대해, 또 부모에 대해 최대의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무의미하게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부모에게 절대적인 상처를 주는 것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정산 양은 그 깨끗한 생명력으로 지상에서 비탄에 잠긴 아버지와 어머니를 하늘의 기쁨과 생명 속으로 끌어올릴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최 형 부부께서는 또한 아기로 말미암은 절대적인 그 상처가, 앞으로 하늘에서 정산 양을 만나는 이외에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것을 믿어, 이 인생 최대의 비애 가운데서 더욱 믿음에 굳게 서기를 비는 바입니다.

『성서연구』 제67호 (1957년 3월)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태도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른들은 욕심과 타산에서 우정 관계나 천륜 관계까지 그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세계에는 이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들은 이 근본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참고 달게 받을 줄 압니다. 아니, 이 근본적인 관계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전부인 것입니다. 어머니면 그만입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과연 그대로 생명인 것입니다.
...... 어린아이들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은, 모든 것을 거저 요구하고, 거저 받고, 또 갚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주는 것보다 받을 줄 아는 것이 더욱 위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타산이 없고 공덕(功德) 관념이 없습니다.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그저 “네, 네, 고맙습니다, 좋습니다, 더 주십시오,” 그리고 순종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