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 선생
<노평구전집> 부활 신앙과 현실 생활
안티고네
2001. 7. 17. 11:53
마태복음 22장 23-30절에는 부활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있다. 이는 예수의 최후 예루살렘 상경(上京) 때, 부활을 믿지 않는 당시 사두개인들이 내세 부활신앙에 대해 그들로서는 최대의 지혜를 짜서 예수에게 한 질문으로, 성경에서는 보통 “부활문답”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 본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같은 날에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에게 이런 말로 질문했다. “선생님, 모세는 만일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은 경우에는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형의 가계(家系)를 이을 상속자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어, 장남이 결혼하여 죽고 자식이 없어 처를 동생에게 남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둘째도, 셋째도, 마침내 일곱째까지 죽고 제일 나중에 여자도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이 여자는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처가 될까요? 모두 그 여자를 취했으니까요.” 예수가 대답했다.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다. 부활 때에는 장가가는 법도 시집가는 법도 없고, 그들은 다 천사 같이 된다.”>
이 기사는 물론 유대인의 당시 상속법과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부활 문제로써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현실의 연장으로 알았고, 예수는 이를 사람의 내세에서의 완성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인의 제사장, 귀족 계급으로, 유대 산헤드린, 즉 의회의 다수 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철저한 세속적인 현실주의자들로서, 전체 국수적인 유대인들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그리스, 로마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므로 외세에 아부하고 금력과 명예와 지위를 장악, 사실상 예루살렘 신전과 종교를 강도의 소굴로 타락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이런 현실주의자들에게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내세란 필요 없는 것이다. 아니, 도무지 이를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의 천국은 철저히 현실이고, 그들의 행복이란 지상의 향락, 지위, 명예의 획득이며, 그들의 완성이란 욕심의 완성, 이기주의의 철저, 시기, 질투, 거짓, 증오 등 온갖 죄악을 통해 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인생과 생활과 행위의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그러나 내세 신앙, 부활 신앙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정신과 이상과 도덕과 영혼에 깊이 관련되는 것이며, 실로 이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이 정의를 위해 육체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내세 존재의 확증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정, 댄스홀을 천국으로 아는, 본능 생활 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현실주의자와 향락주의자들, 그리고 사상은 뇌세포의 작용이며, 도덕은 당분의 분비 작용이며, 영혼은 복합 신경의 작용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상가, 과학자, 교수, 논객, 문사(文士)들 또한 내세 신앙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결국 내세 신앙을 갖기가 어려운 이유는, 내세의 유무 때문이 아니라 도덕의 부정, 죄악의 자행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라 하여, 교리적으로는 내세 신앙과 부활 신앙을 믿고 있으면서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 가운데 있는 자란 거짓 신앙 위에 서 있는 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기독교는, 부활절 촛불 예배는 열심히 참가하면서, 부활 생명에 의한 철저한 신앙 생활, 현실 생활이 없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내세 신앙과 부활 신앙은 이렇게 우리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서도 현실 신앙 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성서연구』 제 68호 (1957년 4, 5월)
앙리 루소 <꽃>
"......이런 현실주의자들에게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내세란 필요 없는 것이다. 아니, 도무지 이를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의 천국은 철저히 현실이고, 그들의 행복이란 지상의 향락, 지위, 명예의 획득이며, 그들의 완성이란 욕심의 완성, 이기주의의 철저, 시기, 질투, 거짓, 증오 등 온갖 죄악을 통해 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