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선생

[세계일보] 김교신 탄생 100주년 맞아 생애 조명(5월 17일자)

안티고네 2001. 5. 19. 09:08

"암울한 식민 시절 '無敎會신앙' 큰 획"

그리스도에 대한 참신앙보다는 교회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으로 변질돼 가는 세태를 일찍이 통렬하게 공박한 사람이 있었다. 형식적인 겉치레를 과감하게 버리고 초기 교회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향했던 무교회(無敎會)주의자 김교신(1901∼1945) 선생이 그 사람이다.

함석헌과 함께 이땅에 처음으로 무교회신앙을 받아들였던 김교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전집이 복간되고 강연회도 열리는 등 암울한 식민지시절을 민족적 기독인으로 굵게 살다간 김교신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다.

이번에 도서출판 부키에서 김교신의 제자 노평구씨가 복간한 김교신 전집은 김교신 선생이 집필한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이 전집은 이미 1964년부터 1975년까지 10여년에 걸쳐 7권으로 출간된 적이 있지만, 한정본으로 만들어져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국한문 혼용의 세로쓰기로 편집돼 접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이번에 복간된 전집은 김교신의 힘찬 에세이의 맛을 살리기 위해 한자어를 원문대로 살리면서 오류를 잡아냄과 동시에 읽기 쉬운 대중적 독서물로 편찬한 데 그 의의가 있다. 전집 복간과 함께 지난 13일에는 서울 YMCA 2층 강당에서 많은 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교신 기념 강연회'도 열려 김교신 선생의 짧은 삶에 깃들인 숭고한 기독인의 자세를 돌아보았다.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외솔회'는 일찍이 김교신을 가리켜 "민족 구원의 복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인도했고, 드디어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생명을 묻어 단절된 민족사를 이어준 다리가 됐다"며 "선생의 생애는 죽은 민족사의 황야에서 신음하는 한국의 구원이었고, 한국의 그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었고, 한국이 품고 있는 순정으로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고 기린 적이 있다. 여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김교신의 생애는 민족애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결합시킨 드문 삶이었다.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후일 벗이자 신앙의 동지가 되는 함석헌과 함께 입학한다. 그가 기독교에 접하게 된 것은 1920년 거리에서 설교를 듣고서였는데, 그가 다니게 된 교회에서 목사가 반대파에 의해 축출되는 병폐를 목격한 뒤 무교회신앙을 주창한 우치무라 간조(內村監三)의 성서강의 청강을 계기로 무교회주의자로 변신했다.

1927년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 책이 지닌 민족적 색채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요주의 인물로 찍히기도 했던 김교신은 해방을 목전에 두고 타계할 때까지 이 책의 발간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무교회신앙은 특정 공간이 아닌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교회이며, 성직자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는 세례가 아닌 각자의 회심(回心)을 통해 영(靈)으로 받는 세례를 진정한 세례로 여긴다. 성서 해석은 성직자나 교회가 아닌 신자 각자가 하느님에게 받은 믿음과 은총의 분수에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는 근거에서다. 이 때문에 기존 기독교 교단에서는 무교회 신앙을 이단으로 치부하며 철저하게 배격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참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일제에 저항하다 쓰러졌지만, 다른 교회측은 오로지 신앙과 전통만을 간판으로 내걸고 민족 해방에 대해서는 방관자적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한 언론인 송건호씨의 글에서 보듯 김교신과 무교회신앙에 대한 평가는 새롭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 창간사에 밝혀놓은 다음 대목은 오늘날의 기독신앙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있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외인(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會堂)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조용호기자 jhoy@sgt.co.kr








새로 복간된 <김교신전집> 1권(인생론), 2권(신앙론), 그리고 별권(김교신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