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선생
[중앙일보]`무교회주의자` 김교신 재조명 활발(5월 4일자)
안티고네
2001. 5. 12. 12:40
<중앙일보> 2001년 5월 4일자에 김교신 선생 관련 기사가
실렸습니다.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재조명 활발
함석헌(咸錫憲.1901-89) 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김교신(金敎臣.1901-45) 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었다. 일본(동경고등사범학교) 에 유학, 같은 일본인 스승(우찌무라 간죠.內村監三) 에게 기독교를 배우고, 귀국해 교사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 운동을 벌인 한국 기독교의 선각자들이다.
무교회주의란 교회와 성직자로 대표되는 기성 기독교의 조직과 제도를 비판.거부하고, 원시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신앙과 성서 공부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한 분파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김교신이 해방되기 직전 44세로 급사(急死) 한 반면, 함석헌은 88세로 장수하면서 60.70년대를 통해 사회운동가.사상가로 명성을 얻었다는 점이다.
김교신이 '무교회주의' 라는 엄격한 신앙생활을 고수한 반면 함석헌은 해방후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면서 퀘이커교도로 개종한 점도 큰 차이다.
무교회주의를 이 땅에 알린 '성서조선' 이란 잡지를 창간한 것은 두 사람을 포함한 동인들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잡지를 꾸려간 사람은 김교신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무교회주의자들은 함석헌 보다 김교신을 더 높이 평가한다.
이들이 김교신을 재조명하며 한국교회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추모행사를 마련한다. 드러내기를 싫어하며, 성서 공부에만 몰두해온 무교회주의자들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들은 다음 주말 김교신의 글을 모은 『김교신 전집』(도서출판 부키) 을 선보이며, 13일 오후 2시에는 서울 YMCA강당에서 '김교신 기념 강연회' 를 연다.
전집은 모두 8권으로 김교신이 '성서조선' 에 썼던 글을 인생론.신앙론.성서개요.강의 등 내용별로 재분류했다. 마지막 8권은 김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모사와 인물평을 묶은 것. 1권(인생론) .2권(신앙론) 과 마지막 8권이 1차로 다음주 선보인다.
전집출간을 준비중인 무교회주의자 박상익(朴相益.48.우석대.서양사) 교수는 "김교신은 그리스도를 만난 한국의 선비" 라며 "교회사 속의 비중에 비해 너무 안알려져 왔기에 1백주년을 맞아 1차 자료를 정리해 내놓았다" 고 밝혔다.
'그리스도를 만난 한국의 선비' 란 말은 '성서조선' 이란 말처럼 기독교 신앙과 한국적 전통을 동시에 강조하는 말이다. 김교신이 주창한 기독교 신앙이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 , 민족적 특수성에 기초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종교학자인 임성빈(任成彬.43.장신대) 교수는 "무교회주의는 기성 기독교계의 제도와 형식을 비판했기에 상당히 경원시돼 왔다. 또 무교회주의 신앙인들 역시 소규모로 상당히 전문적인 성서공부를 하는 식으로 활동해와 대중적인 신앙운동이 되기 힘들었다" 면서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주의와 세속화가 심각한 시점에서 김교신의 순수하고 철저한 신앙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고 말했다.
오병상 기자
<김교신 약력>
▶1901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보통학교.농업학교.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
▶28년 귀국,양정고보.경기중 교사로 재직하면서 ‘성서조선’발간.
▶42년 ‘성서조선’권두언이 반일(反日) 이란 이유로 구속.수감. 잡지는 폐간.
▶43년 출소,흥남질소비료공장 취업.
▶1945년 4월 발진티푸스로 운명.
무교회주의자 김교신(1901-1945)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재조명 활발
함석헌(咸錫憲.1901-89) 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김교신(金敎臣.1901-45) 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었다. 일본(동경고등사범학교) 에 유학, 같은 일본인 스승(우찌무라 간죠.內村監三) 에게 기독교를 배우고, 귀국해 교사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 운동을 벌인 한국 기독교의 선각자들이다.
무교회주의란 교회와 성직자로 대표되는 기성 기독교의 조직과 제도를 비판.거부하고, 원시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신앙과 성서 공부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한 분파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김교신이 해방되기 직전 44세로 급사(急死) 한 반면, 함석헌은 88세로 장수하면서 60.70년대를 통해 사회운동가.사상가로 명성을 얻었다는 점이다.
김교신이 '무교회주의' 라는 엄격한 신앙생활을 고수한 반면 함석헌은 해방후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면서 퀘이커교도로 개종한 점도 큰 차이다.
무교회주의를 이 땅에 알린 '성서조선' 이란 잡지를 창간한 것은 두 사람을 포함한 동인들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잡지를 꾸려간 사람은 김교신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무교회주의자들은 함석헌 보다 김교신을 더 높이 평가한다.
이들이 김교신을 재조명하며 한국교회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추모행사를 마련한다. 드러내기를 싫어하며, 성서 공부에만 몰두해온 무교회주의자들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들은 다음 주말 김교신의 글을 모은 『김교신 전집』(도서출판 부키) 을 선보이며, 13일 오후 2시에는 서울 YMCA강당에서 '김교신 기념 강연회' 를 연다.
전집은 모두 8권으로 김교신이 '성서조선' 에 썼던 글을 인생론.신앙론.성서개요.강의 등 내용별로 재분류했다. 마지막 8권은 김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모사와 인물평을 묶은 것. 1권(인생론) .2권(신앙론) 과 마지막 8권이 1차로 다음주 선보인다.
전집출간을 준비중인 무교회주의자 박상익(朴相益.48.우석대.서양사) 교수는 "김교신은 그리스도를 만난 한국의 선비" 라며 "교회사 속의 비중에 비해 너무 안알려져 왔기에 1백주년을 맞아 1차 자료를 정리해 내놓았다" 고 밝혔다.
'그리스도를 만난 한국의 선비' 란 말은 '성서조선' 이란 말처럼 기독교 신앙과 한국적 전통을 동시에 강조하는 말이다. 김교신이 주창한 기독교 신앙이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 , 민족적 특수성에 기초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종교학자인 임성빈(任成彬.43.장신대) 교수는 "무교회주의는 기성 기독교계의 제도와 형식을 비판했기에 상당히 경원시돼 왔다. 또 무교회주의 신앙인들 역시 소규모로 상당히 전문적인 성서공부를 하는 식으로 활동해와 대중적인 신앙운동이 되기 힘들었다" 면서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주의와 세속화가 심각한 시점에서 김교신의 순수하고 철저한 신앙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고 말했다.
오병상 기자
<김교신 약력>
▶1901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보통학교.농업학교.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
▶28년 귀국,양정고보.경기중 교사로 재직하면서 ‘성서조선’발간.
▶42년 ‘성서조선’권두언이 반일(反日) 이란 이유로 구속.수감. 잡지는 폐간.
▶43년 출소,흥남질소비료공장 취업.
▶1945년 4월 발진티푸스로 운명.
무교회주의자 김교신(1901-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