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 자료
[신앙단상] 작가 최인훈이 본 한국 사회.
안티고네
2001. 5. 11. 22:24
오늘은 작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한국 사회와 기독교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한데 모아 올립니다.
예전에 읽어두었던 것인데 지금 보아도 흥미를 느낄만한 부분이 있더군요.
인용한 자료는 崔仁勳, <廣場>(문학과 지성사, 1986)입니다.
p. 32.
다만 이들 오뉘에게 한가지 좋은 데가 있다면, 부르주아의 집안 아이들이 흔히 갖는 덕--너그러움이다. 그저 그렇게 지내려면 좋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무치는 이야기 같은 것은 아예 밥맛 없어하는 사람들이다.
p. 55.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뭐니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가 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 돼있단 말이에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정치의 廣場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가득 쌓였어요.
p. 57.
저희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였어요. 국고금을 덜컥한 정치인을 아버지로 가진 인텔리 따님의 말이 풍기는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겁니다. 오,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가는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각기의 밀실은 신분에 맞춰서 그런 대로 푸짐합니다. 개미처럼 물어다 가꾸니까요.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있습니다.
p. 88.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지라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 모른다. 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거다.
pp. 120-121.
……이른 봄 어느 날 월북한 이래로 그들 부자는 처음 부딪쳤다. 명준은 터지는 마음을 그대로 쏟았다. "이게 무슨 人民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人民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人民의 나랍니까? ……
人民이라구요? 人民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가슴속에서 불타야 할 자랑스러운 정열, 그것만이 문젭니다. 이남에는 그런 정열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비루한 욕망과 탈을 쓴 권세욕과 그리고 섹스뿐이었습니다.
서양에 가서 소위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놈들이 돌아와서는 자기 몇 대조가 무슨 판서, 무슨 참판을 지냈다는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人民의 등에 올라앉아 외국에서 맞춘 알른거리는 구둣발로 그들을 걷어차고 있습니다."
p. 179.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에르케고르 선생 식으로 말하면, 實存하지 않는 사람들의 廣場 아닌 廣場이었다.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다만 좋은 데가 있다면,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自由와 게으를 수 있는 自由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