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 자료
[논평] 자폐증 걸린 신앙인들을 위하여...
안티고네
2001. 5. 11. 21:33
오늘은 『논어의 발견』,『새번역 논어』의 저자이신 이수태 선생님과 저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귀를 기울여 배울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판단되어 이렇게 올립니다.
이수태 선생님은 <과학/인문> 섹션에『어리석음과 더불어』라는 칼럼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이수태 선생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온라인 상에서 이미 공개적으로 오갔던 대화 내용이기에 이렇게 제례하고 올립니다.)
박상익의 글
이수태 선생님.
올려주시는 글 늘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작가 박영준 선생님과의 젊은 날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도 느끼게 하는 바가 많더군요.
선생님...
외람되지만 한가지 청을 올려도 될는지 모르겠군요.
선생님께서 쓰신 논어 관련 저술들의 내용을 이 칼럼을 통해 소개하실 수는 없으실는지요?
젊은 날의 고전 독서란 평생 남는 정신적 자산일진대, 요즘은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런 기풍이 점점 시들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제가 틀렸다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새로이 쓰시는 글 사이 사이에, 기왕에 쓰셨던 글도 소개를 해주시면, 저 자신은 물론이고, 인터넷을 유랑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읽을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같은 메시지일지라도, 인쇄 매체는 인쇄 매체대로, 인터넷은 인터넷대로 각기 쓰임새가 다를 것 아닌가 싶어서지요...
선생님의 뜻을 잘 모르고 문득 떠오르는대로 올리는 글이오니, 부담 갖지 마시고, 그저 이런 생각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선에서 참작해 주셨으면 합니다.
『논어의 발견』은 요즘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이수태 선생님의 답글
박상익 교수님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얼마되지 않는 글을 올리면서도 논어에 관련된 글은 제16호 칼럼 하나 정도밖에 없는 것 같군요.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을 쓴 것은 1994년부터 약 3년간이었고 그 후 퇴고한 기간까지 합치면 약 6년간이었습니다.
처음 2년 정도는 의욕적으로 썼고 보람도 컸지만(『논어의 발견』 제1, 2, 3편은 이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그 후부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쓰기 시작한 지 4년째 되던 해부터는 그것이 거의 삶의 질곡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출판사 사장과 만나 얘기할 때 이 책을 출간하려는 목적의 하나가 논어에서 떠나기 위해서라고 했을까요.
6년 동안 저는 논어와 관련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심지어는 생각도 거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책이 출간되고부터는 의도적으로 논어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것이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즈음은 저의 입으로 저의 생각을 말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한 평생을 통하여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그 공부를 뱃속에서 소화해서 우리 삶의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 평생 기독교 공부를 한 결과가 입만 벙긋하면 “하나님”, “믿음”, “구원”이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평생 헤겔을 공부하여 절대정신과 변증법만 찾고, 한평생 하이데거를 공부하여 현존재와 기투(企投)만 찾고, 한평생 공자를 공부하여 인의(仁義)와 예악(禮樂)만 찾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학문도 그런 자폐증 같은 공부 방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전문분야의 노력은 나름대로 필요하겠지요. 저의 책도 분명히 그 일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면 절대 안 된다고 봅니다. 학문을 위한 학문이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한 원인이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를 연습한다는 것에서 칼럼을 쓰는 또 하나의 의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목소리가 얼마나 초라한가를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작업을 밀고 나가보려 합니다.
박교수님 조언해주신 대로 해보겠습니다. 논어를 구태여 회피하는 것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또 제가 관찰했던 논어의 세계에 저의 목소리를 담아보고 저의 목소리 속에 논어의 세계를 띄워보는 것도 무언가 고무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을 것도 같군요.
늘 보내주시는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