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번역

[독서노트] 『괴테와의 대화』

안티고네 2001. 3. 26. 17:51

에커만 지음, 박영구 옮김 『괴테와의 대화』(푸른숲, 2000)

<오마이뉴스>2001년 5월 22일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1.


『괴테와의 대화』는 예전에 삼중당 문고판으로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책이다. 옛날에 읽었던 삼중당 문고판은 초역이고 이번에 나온 것은 완역이다. 삼중당 문고본을 지금도 갖고 있는데, 그 책 마지막 페이지에 “79년 3월 2일 讀了. 최대의 공감!”이라고 써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감동을 맛보며 읽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새로 번역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과거에 읽었던 느낌이 제법 많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괴테가 직접 쓰지 않은 것이면서도 괴테 전집에 반드시 포함되는, 괴테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이 책의 저자인 에커만은 젊은 날 괴테의 인격과 사상과 문학을 흠모하여, 자신의 직업을 가질 기회마저 포기하고 젊은 날을 오로지 괴테와의 대화에서 얻는 배움에 희열을 느끼면서 지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문학이 아닌 일상생활을 통해 괴테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괴테도 위대하지만 에커만의 열정도 참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커만은 “인간이란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는 끊임없는 열망에 따라 교양을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이른바 “밥벌이가 되는 학문”을 외면하고 내면의 음성을 따랐다. “밥벌이가 되는 학문”은 그가 “천성적으로 지향하는 것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에커만은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적으로 한층 성숙해지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열정을 영어로는 enthusiasm이라고 한다. 르네 듀보는 그 말의 어원(en + theos)을 풀어 “내재(內在)하는 신(a God within)”이라고 설명한다. 내 안에 “신”이 임한 것이 열정이라는 뜻이다. 르네 듀보의 해석대로 한다면 열정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정적인 삶이란 이유 모를 열정에 이끌리어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불태우는 삶이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불행을 수반하는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충만한 삶이 아닐까? 모든 위대한 생애가 그런 것 아니었던가? 그런 열정 없이 오로지 밥벌이를 기준으로 생애 사업(life work)을 결정짓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인생이 갑자기 불쌍해지려 한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18세가 아니라는 것이 기쁘네. 내가 18세였을 때는 독일이란 나라도 겨우 18세밖에 안되어서, 아직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었지.‥‥‥ 나는 이렇게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 시대에 사는 젊은이가 아니어서 행복하네.”

요즘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 이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외국으로 이민 가는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온통 난리다. 하지만 어디 교육뿐인가?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왜곡된 현대사를 겪으면서 정치, 사회, 경제 등 구석구석이 엉망진창이고, 어떤 면에서는 국가 장래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낄 만큼 위기 국면에 놓여 있다.

그러나 괴테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점도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 독일에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방송인 이한우 씨(얼마 전에 보니 이름이 "이참"으로 바뀌었다)가 몇 해 전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회자가 “왜 독일을 떠나 한국에 왔느냐”고 묻자, 이참 씨는 “독일은 사회 구조가 이미 확립되어서 한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지만 한국에서는 해볼 여지가 아주 많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괴테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참 씨에게 독일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 사회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그 정반대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미비한 점이 많을수록 젊은이들에게 할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이니, 우리는 오히려 행복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닌가?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선망하는 선진국 젊은이들의 상당수는 어떤 의미에서 불행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한 개인이 사회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극도로 제한되다보니, 그 결과 오로지 먹고 사는 경제 문제에만 매달리는 소시민적 삶을 살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약, 동성애, 총기난사 등 각양각색의 퇴폐적이고 일탈된 행위에서 돌파구를 구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 삶이란 열매나 결과보다는, 가치와 보람을 향해 목표의식을 갖고 투쟁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직 해야 할 일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한국 사회야말로, 비록 고되기는 하지만 삶의 과정을 통해 값진 성취감을 맛보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의 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였을까? 괴테는 “과정”의 중요성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은 늘 작업을 끝내기만 바라며 작업 자체에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작가는 제작 과정에서 최상의 기쁨을 발견하지.‥‥‥ 재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예술 그 자체에 만족하지 않고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그것을 끝내고 얻게 될 이익만을 염두에 두는 법이지. 하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목적과 경향만으로는 위대한 것을 결코 이룰 수 없네.”

 

2.

 

에커만은 성격이 그다지 원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루는 괴테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임에 나가면, 흔히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거나 역겨운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제 자신의 고유한 성격에 맞는 인물을 찾아 그에게는 기꺼이 내 전부를 바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자기 성격을 다른 사람에 맞춰 바꿔볼 의향도 없는 사람들이 대개 이런 식일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에커만의 성격과 닮은 점이 얼마간 있을 것 같다. 괴테는 에커만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해준다.

“자네의 그런 천성은 물론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네.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성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자기와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네.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았네. 나는 어떤 한 사람을 언제나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보면서 그 개인을 탐구하고 그의 독자성을 알려고  노력해왔네. 하지만 그 이상의 공감은 바라지 않았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어떤 사람과도 사귈 수가 있게 되었네. 또한 그렇게 해야만 다양한 성격들을 알게 되고 생활에 필요한 민첩성도 얻게 되는 법일세. 성격이 전혀 상반된 사람을 만났을 경우에는 그들과 어떻게든 잘해나가도록 애써야 하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면이 자극도 받고 발전도 하고 성장도 하게 되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스스로 성숙한 느낌을 갖게 되는 거네.”

인생 제반사를 ‘정신적 성숙’이란 관점에서 바라보는 괴테의 시각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정신’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실을 사랑하는 정신 그리고 진실을 찾아내서 받아들이는 정신을 갖추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괴테는 인간 정신의 불멸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의 정신은 완전히 스러지지 않는 존재이며,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세.”

괴테는 인간의 죽음을 태양에 비유한다. “세속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태양은 저녁이 되면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라앉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육신의 눈으로 보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정신은 살아남아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괴테는 인간이 불멸성을 믿어야 하며 믿을 권리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천성에도 맞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영생에 대한 확신이 ‘활동’이라는 개념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나의 현존 양식이 나의 정신을 더 이상 지탱해나갈 수 없을 때 자연은 나에게 다른 존재 양식을 부여해야만 하기 때문이네.”

하루는 에커만이 이웃 사람으로부터 들판에서 포획한 종달새 둥지를 하나 얻었다. 그 안에는 종달새 한 마리와 새끼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미 새가 방안에서 새끼에게 끊임없이 먹이를 줄뿐만 아니라, 창 밖으로 풀어놓아주어도 다시 새끼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에커만은 그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자기 몸의 위험을 돌보지 않는 그런 어미의 사랑에 진한 감동을 느낀 것이다. 에커만이 그 이야기를 괴테에게 들려주었더니, 괴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둔한 친구가 어디 있나! 자네가 신을 믿는다면 그런 일에 놀라지도 않을 걸세. 만약 신께서 종달새에게 어린 새끼에 대한 그런 무한한 보호 본능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또한 그 같은 일이 자연계의 모든 생물에게 똑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결코 존속할 수 없을 걸세! 하지만 신의 힘은 그와 같이 어디에나 퍼져 있으며, 영원한 사랑은 어느 곳에나 다 작용하고 있다네.”

괴테는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 조각을 보고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

“이것 보게! 이것은 지고한 성격의 제재(題材)일세. 세계를 유지시키면서 자연계에 고루 퍼져있는 양육의 원리가 이 작품에 아름답게 비유되어 나타나고 있네. 나는 이런 모습이나 이와 비슷한 상을 신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네.”

우리나라에는 종교 인구가 무척 많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굳게 믿고 있는지, 그리고 정신의 성장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의문이다.

‘낮은 울타리 회’라는 이름을 걸고, 고급 옷가게에서 사치스런 쇼핑이나 즐기던 옷 로비 사건의 주인공들에게는 과연 ‘정신의 성숙’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면서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내뱉은 세 여인에게 과연 ‘신’과 ‘영원’이란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들의 천국은 철저히 현실이고, 그들의 행복이란 지상의 향락, 지위, 명예의 획득이며, 그들이 말하는 완성이란 욕심의 완성, 이기주의의 철저, 시기, 질투, 거짓, 증오가 아닐는지? 유물론적 그리스도인들이 괴테의 반만큼이라도 신앙심을 가졌더라면‥‥‥.

 

3.

 

괴테는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위대성을 인정한 최초의 독일인으로 꼽힌다. 그의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곳곳에는 『햄릿』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런 괴테가 영국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는 어느 날 에커만에게 독일에 체류 중인 영국인들을 차례차례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에커만은 어느 날 오후 영국인 공병장교 한 명을 괴테의 집으로 데려갔다.

괴테는 이 영국군 장교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에커만은 “이 외국인을 대하는 괴테의 극히 사랑스런 태도와 밝고 온후한 모습이 오늘 참으로 멋있어 보였다.”고 말한다.

이 영국인 장교는 괴테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국에서는 지금 독일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서 나날이 널리 보급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좋은 가문의 영국 젊은이치고 독일어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하긴 괴테가 살았던 19세기는 영국에서도 독일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었던 시기였다. 이 무렵 영국의 문인이자 역사가인 토머스 칼라일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영국에 최초로 소개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괴테는 이렇게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점에서는 우리 독일인이 당신 나라 사람들보다 반세기나 앞서 있소. 나도 50년 전부터 영어와 영문학에 몰두해왔으니까, 귀국의 작가나 생활, 제도 등을 아주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영국에 가더라도 낯설지는 않을 거요. ‥‥‥

귀국의 젊은이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잘하는 일이오. 왜냐하면 우리 독일 문학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를 잘 배워두면 다른 많은 언어를 알지 못해도 상관없기 때문이오. 물론 프랑스어만은 예외이긴 하지요. 프랑스어는 사교 언어여서 특히 여행 때는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일거요. 프랑스어는 누구나 알고 있어서 어느 나라를 가든 뛰어난 통역관의 도움 없이도 프랑스어만으로 볼일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 이탈리아어와 에스파냐어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민족의 대표작들은 매끄러운 독일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아주 특수한 목적이 아닌 한 그들 언어를 힘들게 배우느라 많은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지요. 외국의 모든 것을 나름대로의 특색대로 평가하여 이질적인 특성에 순응하는 것이 독일인의 천성이오. 이러한 사실에 더해 또 독일어는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독일어 번역본은 철저히 원작에 충실해서 완전한 작품이 되는 거라오.

또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본이 있으면 대단히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오.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틴어를 하지 못했소. 하지만 프랑스 번역본으로 키케로를 읽었는데, 우리들이 원어로 읽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소.”


독일어의 지적 인프라와 부가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괴테를 보면서, 우리는 21세기 한국어의 위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괴테가 했던 이 말을 출판평론가 표정훈 선생에게 알려주었더니 표 선생은 재빨리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패러디 했다. (놀라운 순발력 아닌가!)

아, 과연 우리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외국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귀국의 젊은이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잘하는 일이오. 왜냐하면 우리 한국 문학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잘 배워두면 다른 많은 언어를 알지 못해도 상관없기 때문이오. 물론 영어만은 예외이긴 하지요. 영어는 국제 공용어여서 특히 여행 때는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일거요. 영어는 누구나 알고 있어서 어느 나라를 가든 뛰어난 통역관의 도움 없이도 영어만으로 볼일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일본어, 이태리어, 에스파냐어, 고전 중국어(한문)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민족의 대표작은 매끄러운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아주 특수한 목적이 아닌 한 그들 언어를 힘들게 배우느라 많은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지요. 외국의 모든 것을 나름대로의 특색대로 평가하여 이질적인 특성에 순응하는 것이 한국인의 천성이오. 이러한 사실에 더해 또 한국어는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은 철저히 원작에 충실해서 완전한 작품이 되는 거라오.

또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본이 있으면 대단히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오. 김대중 대통령은 고전 중국어를 하지 못했소.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으로 『사기(史記)』를 읽었는데, 우리들이 원어로 읽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