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 선생
<노평구전집> 속죄 단상(贖罪 斷想)
안티고네
2000. 9. 26. 18:36
금년에 여섯 살 난 딸 유희(柔姬)와 아들 영(永)이가 홍역을 앓았다. 영이가 더 심했다. 얼굴과 전신에 돋은 심한 발진, 코와 입의 오물 등, 평소 천사 같이 아름답던 그들의 육체 어디에 그런 병균이 잠복하고 있었나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보고 우리의 마음의 죄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외면으로 천사같이 빛나고 양같이 순하고 꽃같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의 마음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이다"(로마서 1: 29-31). 실로 "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 사람 밖에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고 예수가 말씀하신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마가 7:15이하). 그가 선고하신 대로 나는 실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간음자요,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자이다.
예수가 바리새인의 허위를 책망한 것은 그 허위 속에 이런 죄악이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업은 그러므로 예수의 사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군중이, 그리고 그들보다 더욱 교만과 위선의 상징이었던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그에게 끌고 와서 돌로 타살하려 할 때, 땅 위에 묵묵히 손가락으로 글을 쓰시는 예수의 심정은 군중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여자에 대한 동정이나 죄의 간과는 아니었다. 여자는 여자대로 예수 앞에서 자기의 죄악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군중이 자책에 못 이겨 묵묵히 돌아갈 때, 여인은 더욱 천지가 캄캄하게, 아니 천지가 무너지는 듯 자기의 죄를 느꼈다.
육체의 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공포를 느끼는 어린애들의 병석에서 내가 눈물을 머금은 것은, 그들이 한시도 어머니를 놓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예수 없이 살려고 하는 것은, 그리고 이 미지근한 신앙 상태는, 우리가 자기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는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바리새인 같이 자기의 조그마한 도덕과 금식과 선행과 공로와 위선으로, "나는 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이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하는 교만이요, 불신임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자기의 죄악을 이 병석의 어린애 같이 느낀다면 우리는 또한 자기의 도덕, 공로, 노력 등에 의지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저 구원에 대한 절규와 의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병세가 한층 더 진전되었을 때, 그들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입에서는 절규도 끊어지고, 그들의 고사리 손이 맥없이 어머니의 손을 놓는, 절망적인 순간이 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때 나는 내가 지난날 구원받던 과정에서, 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분노, 심판과 더불어 나의 양심이 절망적인 암흑과 죽음 가운데 빠졌던 회심 직전의 상태를 회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고통과 그들에게 닥쳐오는 죽음을 대신하려는 생각이 불일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죄악의 결과인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죄 없는 생명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단절과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죄 없는 완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사람의 불순종을 완전히 대신하기 위해 그 자신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가 무엇보다도 그 순종과 사랑과 의를 먼저 완전하게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 인류의 죄악에 대한 그의 분노와 저주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죄 없는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빌립보 2: 6 이하). 실로 하나님 자신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기 위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에 의한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전에 지은 죄를 용서하셔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어 자기도 의롭게 되사고 또한 예수 믿는 자도 의롭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로마서 3: 23 이하).
그러나 성서와는 반대로, 세상 사람은 물론 기독교인 가운데도 속죄는 필요 없다 하여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인 자각과 회개로써, 즉 당당히 우리의 발로 돌아가는 것이고, 또 돌아가기만 하면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은 그대로 우리를 그의 품안에 받아 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간단하고 쉽고 좋다. 그러나 나의 체험으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죽음으로써 나의 죄를 추궁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었다. 루터와 같이, 번연과 같이, 부족하나마 나도 한때 그의 분노에 몰려 절대절명 죽음 가운데 있었다.
그 때에 실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죄를 받았다. 사죄뿐 아니라, 그의 부활 생명으로 성령에 의한 신생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재림을 통해 나의 육체마저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을 보증 받았다. 이것이 나의 속죄의 체험인 구원과 신앙이다. 그러므로 속죄 없이 제 발로 하나님 앞에 간다는 기독교란 사람의 죄악 문제, 양심 문제, 도덕 문제를 완전히 해결치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그들의 신앙이 범신론이 되고, 철학화하고, 신비화하여 도덕적으로 불건전한 상태에, 아니 죄악의 불감증에 떨어져, 죄 속에 아주 눕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래서 과연 속죄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을 구하는데 속죄가 방해된다고 하나, 하나님 자신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준비한 이 그리스도의 속죄로써 온 인류를 신생시키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 속죄가 없다면 인류의 죄악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따라서 나는 이를 우주의 완성과 인류 구원에 대한 유일 확고한 보증이라고 믿는 바이다.
<성서연구> 제40호 (1953년 9·10월)
루소 <알포르의 풍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