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이후의 교실 풍경
중일전쟁 이후의 교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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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수업을 강요하던 당시의 교실 풍경은 이기백(한국사학자, 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임)의 회고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기백은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중학교) 2학년이던 1938년부터 일제가 일본어 수업을 강요했다고 기억한다. 그때까지 오산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치는 두 명의 일본인 교사를 제외하면 일본어로 강의하는 교사가 없었다.
한국인 교사들은 일본어 수업 강요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교실에서 학생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강의하는 교사들이 없었다. 이기백은 역사 교사인 박한석(朴漢錫) 선생이 학생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교탁과 창밖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강의하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한국인 교사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한국인 교사가 한국인 학생들에게, 그것도 어느날 갑자기, 일본어로 강의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민망하고 어색한 장면이었을까. 차마 학생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나라 잃은 백성의 신세를 절감하는 시간과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중에도 수신(修身)을 가르치던 교사 함석헌만은 여전히 우리말로 강의를 계속했다고 한다. 학생들도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의 수업 도중에 일본인 시학관이 교장선생과 함께 그 반으로 들이닥쳤다. 이기백은 문을 급히 여느라고 요란하게 소리가 나던 광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함석헌이 우리말로 강의하는 교실 현장을 덮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기백은 선생들 가운데 일본 경찰과 내통하는 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누군가 일본 경찰에 함석헌의 우리말 강의를 고발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포를 배반하는 반역의 무리는 어디에나 숨어 있는가 보다.
급박한 상황이었다. 우리말 수업 진행 중 느닷없이 일본인 시학관이 난입한 것이다. 함석헌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일본말로 강의를 이어갔다. 학생들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일본말에 능숙한 함석헌의 강의를 들으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안 되어 함석헌은 학교를 떠난다. 이기백은 이 수업 시간을 함석헌의 ‘마지막 수업’으로 기억한다. 《성서조선》 창간 동인이자 신앙 동지인 김교신과 함석헌은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다가 교단을 떠났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김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