쥔장 서평

13. 독서광들이 만든 ‘세계최고’ 사전 <교수와 광인>

안티고네 2017. 9. 30. 11:30

독서광들이 만든 세계최고사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교수와 광인>(세종서적, 2016)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은 전 세계에 유니언 잭을 휘날렸고, 대영제국의 팽창에 따라 영어도 전 지구에 확대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직 문화적으로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 등에 뒤지고 있었다. 이에 영국은 문화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영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시인이자 성공회 주교인 리처드 체네빅스 트렌치(180786)1857115일 행한 연설에서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흔히 OED로 줄여 쓴다)의 편찬 방침을 밝혔다. 편찬 방침의 핵심은 한 어휘가 태어나 성장하고 사라지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각 어휘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라지는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어휘가 처음 사용된 문헌저자를 밝혀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 어휘가 탄생한 후 어떻게 의미가 변천되었는지를 인용문과 함께 일일이 밝혀야 했다. 같은 어휘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기도 하고, 그 뜻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사적 원리에 입각한’(Based on Historical Principles) 사전 편찬 방침이다. 트렌치는 어휘의 의미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전을 구상했는데, 그것은 영어로 된 모든문헌을 읽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 어마어마한 계획은 어느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아니 사전 편집자 수십 명의 힘을 동원하더라도 실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영어로 쓰인 문학 작품 전부를 검토하고, 런던과 뉴욕의 신문, 잡지, 학술지를 샅샅이 검토하는 일은 수많은 사람의 작업을 하나로 엮어내는 어마어마한 대역사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협력체제가 가동되어야 했고, 실제로 보수를 받지 않는 8백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작업에 참여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 중에서 정력적으로 빼어난 예문들을 보내오는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라는 인물이 있었다.<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편집인이었던 제임스 머리 교수는 평소 이런 마이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여러 차례 그를 사전편찬위원회가 있는 옥스퍼드대학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마이너는 번번이 사양하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20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했다.


편지 겉봉에 표기된 마이너의 주소지는 정신이상 범죄자를 수용하는 정신병원이었다. 제임스 머리는 마이너가 정신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일 거라고만 짐작했다. 그러나 제임스 머리가 20년 만에 마이너를 찾아가 직접 만나보니 놀랍게도 그는 그곳에 수감된 무기수였다. 미국의 명문가 출신인 마이너는 예일대 의과대학을 나온 뒤 남북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정신질환으로 제대하고, 영국에 건너왔다가 망상 중에 충동적으로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고 정신병원에 갇힌 신세였다.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정신병으로 고통을 받던 마이너는 우연히 신문에서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호소문을 읽고 <옥스퍼드 영어사전> 제작 업무를 돕기 시작했다.


병원 측은 이 일을 정신병 치료 과정으로 인정하고 마이너에게 방을 하나 별도로 배정했다. 그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책을 사들여 그 방에 개인 도서관을 꾸몄다. 비록 살인을 저지르긴 했으나 뛰어난 학자 기질을 가진 그는 병원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 자신의 방에서 독특한 자기만의 방법을 써서 사전 제작 일을 도왔다. 정신병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는 더욱 이 일에 열광적으로 집착했다. 마이너는 이 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느낌을 받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사전이 마이너와 같은 수많은 독서광(讀書狂)들의 협력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공공 도서관에 맞먹는 방대한 개인 장서를 갖춘 독서광 800여 명이 협력해 세계 최고의 사전’(The Greatest Dictionary in Any Language)을 완성시킨 것이다.


1928년 마침내 초판(10)이 완간되었다. 1884년 제1권이 간행된 뒤 44년이 걸렸고, 트렌치 주교의 1857년 연설이 있은 지 71년 만의 일이었다. 1989년에는 2(20)이 출간되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표방하는 세계 최고의 사전이라는 수사(修辭)는 전혀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어휘수로 보나,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 변천의 역사를 일일이 밝힌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권, 독일어권에서도 이런 사전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해마다 109일이면 한글날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르며 자축한다. 하지만 정녕 세종대왕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맞먹는 우리말사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수많은 독서광이 이 땅에 나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