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덕후의 삶
젊은날 논문 쓰기에 정신없던 시절은 자료 입수에 광분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단 '한줄'을 인용하기 위해 책 한권을 주저없이 사들인다. 필요할줄 알고 사놓고는 한줄도 써먹지 못한 책도 많다. 번역을 하다 원문에 고전 사상가의 작품(예를 들면 마르크스 <자본론>)이 인용되면, 그 작가의 번역본(김수행 역)을 기꺼이 전집으로 사들인다. 전문가 번역을 참조해야 내 번역의 완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저서를 쓰다가 필요한 자료가 생기면 역시 추호의 망설임없이 사들였다. 공공도서관에 대한 불신이기도 했고, 내 집은 '개인도서관'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내 책 <번역은 반역인가>에도 대학도서관에 대한 환멸과 불신 얘기가 나온다). 책 한권 쓰는데 최소 100~500여권의 자료가 필요하다.
책 욕심에 광분하니 강의 자료도 긁어모은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만대사 자료가 필요하다. 어언 1만권 가까운 책이 쌓였다. 아파트 선택에는 질보다는 양의 원칙이 적용된다. 평수가 가급 넓어야 했다. 이사는 금물이었다. 무릇 학인은 유목민 아닌 농경인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사를 안(못) 가니 부동산 경기와는 관계 없는 삶이 꾸려진다. 지금 사는 집에서 18년째다.
아이들이 독립해서 분가를 한다. 부부만 남는다. 줄여서 이사를 가야 한다. 공부 주제를 좁힐 필요도 생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일부 책을 방출해야 한다. 팔 수 있는건 팔고(폐지로^^), 버릴 건 버린다. 그래도 인근에 공부하는 젊은이가 있어 책을 넘길 수 있으니 다행이고 고맙다. 하긴 나도 젊은날 은사님이 방출하시는 책을 거저 받은게 얼마나 많은가. 써야 할 책이 몇 권 남았고, (활자중독자인지라) 읽을거리가 필요한 까닭에 상당수 자료는 끌고가야 한다. 이사 가는데 가장 큰 걱정거리는 책, 책, 책이다. 어디까지 버리고,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