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단두대는 정의롭고 인도적인 사형도구 <왕의 목을 친 남자>
단두대는 정의롭고 인도적인 사형도구
아다치 마사카쓰 지음, 최재혁 옮김, <왕의 목을 친 남자>(한권의책, 2012)
프랑스혁명 시기 발명된 기요틴(단두대)은 그 뒤 2세기 동안이나 처형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프랑스에서 사형수는 1977년까지 기요틴으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18세기말에 사용되기 시작한 끔찍한 처형 도구가 ‘문명국가’ 프랑스에서 20세기말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참수형을 교수형보다 훨씬 끔찍한 처형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생각과는 딴판으로 프랑스 귀족들은 오히려 참수형을 선호했다. 그들은 교수형을 수치스러운 처형으로 간주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같은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더라도, 귀족은 참수형, 평민은 교수형을 받았다. 신분에 따라 처형 방법이 달랐다.
교수형을 당한 죄인의 가족은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견뎌야 했지만, 참수형으로 사형당한 죄인의 가족에게는 불명예가 적용되지 않았다. 참수형에 처해질 사형수에게는 고귀한 신분에 걸맞게 스스로 목을 내밀어 의연하고 당당하게 죗값을 치를 것이 요구되고 기대되었다. 따라서 형 집행 시 곁에서 다른 사람이 옆에서 사형수의 몸을 잡아주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명예로운 처형 방법’인 참수형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사형집행인의 솜씨와 기량에 따라 실패의 가능성이 상존했고, 단칼에 목을 베지 못할 경우 사형수는 처참한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사형 집행인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단칼에 목을 베지 못할까봐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참수형 집행인에게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견딜 수 있는 담력이 요구되었다.
프랑스혁명 발발 직후인 1789년 10월 10일, 기요틴이라는 의원이 국민의회에 의견서를 제출한다. 그는 똑같은 죄로 사형을 당하면서도 신분에 따라 처형 방법이 다른 것은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기요틴은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51세의 의사였다. 그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처형을 제안한다. 고통을 최소화하고, 신속하면서도 확실하게 목숨을 끊는 처형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의와 인도주의를 이루는 기계’ 단두대가 고안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고안자의 이름을 따 ‘기요틴’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기계는 사형수를 엎드리게 한 다음, 위에서 내리치는 칼날로 목을 뒤쪽에서 단번에 절단하는 방식이다.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던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새로운 참수 기계 제작에도 무척 흥미를 보였다. 국왕은 아이디어를 직접 내기도 했다. 1792년 3월 어느 날 튈르리 궁에서 기계 제작을 위한 모임이 열렸다. 칼날을 수평으로 할 것인가 비스듬히 할 것인가를 정해야 했다. 국왕이 의견을 제시했다. 칼날이 수평일 경우 목을 일격에 절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다. 기요틴의 직각삼각형 비스듬한 칼날은 루이 16세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기요틴은 기존의 참수형을 대신하는 새로운 ‘명예로운 처형 방법’이 되었다.
기요틴 제작에 이렇듯 적극 참여했던 국왕이 그로부터 채 1년도 못되어 기요틴으로 처형을 당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왕이 혁명정부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이유는 프랑스혁명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국왕이 적국과 내통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정부에 대한 반역이었다.
자코뱅당의 25세 최연소 의원 생 쥐스트가 1792년 11월 13일 행한 연설은 국왕에 대한 재판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그는 “왕정이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며 그 범죄에 대항해 인간은 떨쳐 일어나 무장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왕이라는 존재는 모두 반역자이며, 찬탈자”라고 선언했다. 1793년 1월 21일, 파리 혁명 광장(콩코르드 광장)에서 루이 16세의 처형이 기요틴으로 집행되었다.
영국 역시 1649년 1월 30일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다. 청교도 시인 존 밀턴은 찰스 1세의 처형을 적극 지지한 영국혁명의 논객이기도 했다. 밀턴은 왕실의 사치와 방종과 타락을 혐오했다. 귀족들은 왕 앞에 직언을 하기는커녕 비굴하게 조아리며 아첨을 일삼았고, 그 대가로 권력의 단맛을 즐겼다. 왕정은 인간성을 타락시킨다는 것이 밀턴의 결론이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17세기 영국과 18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근대 시민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은 왕의 목을 쳐 봤다는 것이다. 절대 권력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근대 국가 성립의 전제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