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에 꿈꾸는 민족 이상
<한글날에 꿈꾸는 민족 이상>
18세기까지 영국에서는 라틴어가 학문의 공통어로 군림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지방어’에 불과한 영어 따위는 위대하고 복잡한 사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였다. 영어가 라틴어의 자리를 감히 넘볼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물론 선각자도 있었다.
머천트 테일러스 학교의 교장을 지낸 교육사상가 리처드 멀캐스터(1530∼1611)는 모국어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1582년에 말했다. “나는 로마가 좋다. 그러나 런던은 더욱 좋다. 이탈리아가 마음에 들지만 영국은 더욱 좋다. 나는 라틴어를 존중하지만 영어는 숭배한다.” 멀캐스터는 영어의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는 당시의 통념을 거부하고 “영어만큼 힘차면서 평이하게 모든 주장을 펼 수 있는 언어는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한 세대 뒤 태어난 셰익스피어(1564∼1616)에 의해 입증됐다.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있었지만 멀캐스터는 현실적 한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국제무대에서 영어는 라틴어와 경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우리 영어가 미치는 범위는 크지 않다. 우리나라 섬들에만 국한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면서 영토를 넓혀 나가려는 제국이 아니다.” 그는 300년 후 그의 조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 중에서도 멀캐스터 시대의 영국인들처럼 한국어의 한계에 불만을 표하면서 ‘한국어 따위’가 감히 영어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100년, 300년을 내다보면 패배주의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 존 밀턴(1608∼74)은 8개 국어에 능통했고, 당시 국제어였던 라틴어 구사 능력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크롬웰 정부에서 10년간 외무부 장관직을 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열등감에 시달리던 변두리 섬나라 국민이었던 밀턴은 라틴어로 작품을 쓰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후진국 언어’인 영어 대신 라틴어로 쓰면 전 유럽인을 독자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턴의 애국심은 영어를 택했다. 그 열매가 ‘실낙원’이다. 밀턴은 영어가 몇 세기 후 이토록 위상이 높아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엘리트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방식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을 미래 비전을 가진 한 국가의 ‘시민’으로 보는가, 아니면 뿌리 뽑힌 ‘난민’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다. 난민은 거주지인 난민촌을 영속적인 곳으로 보지 않는다. 일단 유사시엔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다. 하루살이처럼 당대에만 잘 먹고 잘살면 그것으로 끝이다. 소속 집단에 대한 애정이나 시민적 의무감, 장기적 비전이 있을 리 없다. 겉모습이야 번지르르하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막 사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시민’과 ‘난민’은 모국어에 대한 접근법도 엇갈린다. 시민다운 접근법의 모범은 19세기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양 문명을 접한 일본 엘리트들은 메이지유신 직후 정부 내에 ‘번역국’을 설치, 대대적인 번역 사업을 수행해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모든 국민이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교토산업대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번역 왕국’ 일본이 이룬 쾌거다. 시인 김수영은 1930년 이후에 태어난 한국인이 일본어 해독능력 결여로 세계문화에 무지하다고 개탄했다.
멀캐스터와 밀턴의 영어에 대한 애정과 신념, 일본이 번역에 쏟은 정성의 반이라도 한글에 쏟아보자. 우리도 모국어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갖고 ‘번역청’을 설립하자. 공허한 한글 찬양은 접어두고 모든 국민이 한글만으로도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한글 콘텐트 확충을 위해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자. 이것이야말로 실용이다.
준비된 오리만이 백조로 변신할 수 있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21세기가 저물기 전에 한글 해독능력만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다. 100년, 300년 뒤 한국어가 영어의 위상을 넘보지 말란 법도 없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그러면 이렇게 반문하겠다. 그만한 포부와 비전도 없는 공동체를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