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 오후 일본 동북지방을 침몰시킨 지진과 쓰나미 생중계를 지켜보며 인간이란 자연의 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새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 자동차 심지어 집채마저 쓰나미 앞에선 구겨진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2004년 동남아시아를 휩쓴 쓰나미는 대비 없는 해변의 휴양객들을 덮쳤지만 이번 일본의 쓰나미는 견고하게 축조돼 있는 방파제를 무너뜨리고 가지런히 정돈된 집과 논, 밭, 하천을 순식간에 삼켜버렸습니다. 문명에 대한 자연의 습격이었습니다.
공항에 배가 떠밀려 오고, 논밭에 배가 떠 다녔습니다. 바닷물이 빠진 논, 도로에 나뒹굴고 있는 배들을 보며 성서의 ‘노아의 방주’를 생각했습니다. 아라랏 산위에 정박한 ‘노아의 방주’에는 생명과 희망이 실려 있었는데, 이 배들에는 무엇이 실려 있는 것일까요.
이번 지진은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의 6개 원자로 가운데 4개 원자로의 연쇄 폭발사고까지 유발해 방사능 피폭사태로 번지고 있습니다. 방사능 누출사고는 세계 유일의 원자탄 피폭 국가인 일본 국민들을 66년 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공포로 떨게 하고 있습니다.
지진, 쓰나미, 방사능누출이라는 삼각파고가 일본 열도를 엄습한 형국입니다. 아직 수만명으로 어림될 뿐 정확한 인명피해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지진의 여파는 오래도록 일본인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로 남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종말론은 흔히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신도를 현혹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곤 합니다만 이번 일본 지진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 쯤 종교의 차원이던, 과학의 차원이던 종말론을 생각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듯합니다.
사실 지구의 종말은 공상과학 영화에선 흔한 소재입니다. 최근의 것으로 2009년 국내개봉된 헐리웃의 영화 ‘2012년’이 있습니다. 에베레스트가 물에 잠기는 상황에서 인간이 배를 타고 살아남는다는 설정이므로 현대판 ‘노아의 방주’ 얘기라고 하겠습니다. 선정적인 상술인 줄 알면서도 ‘2012년’이라는 시간적인 근접성으로 인해 나도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3개의 지각판이 부닥치는 곳에 위치해, 크고 작은 지진이 끊이지 않는 일본이기 때문인지 일본의 침몰에 관한 얘기는 오래 전부터 많았던 편입니다. 국내에서도 상영됐던 ‘일본침몰’이라는 영화가 대표적입니다.
일본열도가 침몰하고 일본을 탈출한 소수의 일본인이 세계 각지에서 떠돌이신세로 살게 된다는 음울한 얘기입니다. 고마쓰 사쿄(小松左京)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일본에서 1973년과 2006년 두 차례나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영화 외에도 일본 열도의 침몰을 예언한 많은 동서양의 예언가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중에서 1980년대 탄허(呑虛)스님이 북빙하의 해빙과 지구의 기울기가 바뀌면서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일본열도가 침몰하고, 그 영향으로 서해가 융기해 한국의 영토가 된다고 한 예언에 긴가민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만은 아니었지만 지진과 태풍을 막아주는 점에선 고마운 이웃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해왔습니다. 일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번의 쓰나미는 한반도를 때렸을 것입니다.
일본의 재난을 자신들의 업보라고 뉘우치는 일본인의 글을 인터넷에서 봤지만, 우리가 이웃의 재난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몰지각한 태도라고 봅니다. 지구를 달걀에 비유하면 지각은 달걀 껍질에 해당합니다. 인류는 용암이라는 불덩이의 액체 위에 떠있는 달걀껍질 두께의 지각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습니다.
인류의 삶, 인류의 문명은 그렇게 허약한 바탕에 서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재난은 예고가 없고, 그 앞에서 인간은 무력할 뿐입니다. 일본의 재난을 우리의 재난으로 여겨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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