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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7 글로벌 시대 역행하는 ‘과거형’ 교육과정

안티고네 2010. 11. 17. 07:47

[중앙시평] 글로벌 시대 역행하는 ‘과거형’ 교육과정

서울 G20 정상회의 개최 전후 각 방송사들이 앞다퉈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채널을 돌리던 중 우연히 이탈리아의 문화와 경제를 알아보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앵커의 질문에 유럽 전문가가 나와 답변하는 진행 방식이었다. 앵커와 전문가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이탈리아가 어떤 나라인지 소개해 주시죠.” “유럽 문명의 3대 기반은 로마·기독교·르네상스의 세 가지인데 이 모두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났습니다.”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칙령이 있었죠?” “네, 다신교였던 로마제국이 유일신교인 가톨릭을 받아들였죠.” “313년 당시 그 황제가 누구였죠?” “글쎄요, 기억 못 하겠네요.”

 밀라노 칙령을 내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묻는 질문이었다. 영화 ‘밀라노의 기적’이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작품인 줄을 모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밀라노 칙령’을 내린 황제가 누군지 모른다면 곤란하다. 하긴 다급하면 아버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는 법, 몰아세우는 게 야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초보적 역사지식을 유럽 전문가 자격으로 초대된 교수가 모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G20 의장국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꼭 G20 정상회의가 아니더라도 넓은 시야와 개방적 태도로 세계를 포용하는 것은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 명제다. 포스코 명예회장이자 ‘동아시아 전략가’로 평가받는 박태준 전 총리는 경제도 중요하지만 상대국 지도자의 마음을 훔치는 전략만이 국익을 도모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제철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의 최신 유행가를 일부러 외울 정도였다. 하물며 상대국 역사에 관한 지식은 글로벌 리더에겐 상식이다.

 역사를 인명·지명이나 외우는 암기 과목으로 치부하곤 하지만, 이는 일부 무능한 역사 교사들 때문에 빚어진 오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역사 공부의 효용성을 설명하기 위해 30년 전쟁과 갈릴레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유럽사에서 17세기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은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전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히 싸웠던 이 시대는 또한 갈릴레이(1564~1642)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의 수모를 당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봤을까? 당연히 30년 전쟁이었다. 전 유럽이 전쟁으로 요동치던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일개 과학자의 지동설 주장과 그로 인한 가택연금은 존재감도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평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역사는 압도적으로 갈릴레이에게 더 큰 비중을 둔다. 200년, 300년 역사가 흐른 뒤 돌아보니 하찮아 보였던 갈릴레이의 영향력이 유럽을 휩쓸었던 30년 전쟁을 훨씬 능가했다는 것이 러셀의 설명이다.

 만일 17세기에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가 있어 당대의 혼란 속에서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갖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면, 유럽사 아니 세계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학문과 지식의 진보는 얼마나 가속화됐을 것인가. 현실은 언제나 흙탕물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혼돈 속에서 무엇이 더 영속적이고, 더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를 수 있다. 물 위의 거품에 현혹되지 않고 심해의 흐름을 짚을 줄 아는 통찰력을 배양할 수 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역사는 지도자와 엘리트를 위한 학문 즉 제왕학(帝王學)의 핵심이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07년 교육과정에서 고교 역사 교육을 강화하기로 하고 1학년 과정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를 결합한 ‘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그래 놓고 2009년엔 ‘미래형 교육과정’을 하겠다며 ‘역사’를 필수에서 다시 선택과목으로 돌려버렸다. 결정된 정책을 단 한 번 시행도 해보지 않고 뒤집은 것이다.

 조령모개(朝令暮改)라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콘스탄티누스’를 모르는 유럽 전문가를 앞으로도 계속 기를 것이며, ‘30년 전쟁’의 진흙탕 속에서 ‘갈릴레이’의 잠재력을 분별해낼 역사의식을 지닌 글로벌 리더의 등장을 원치 않는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과거형’ 교육과정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시대에 역행하는 교육 과정을 주도한 그들이야말로 혼탁한 현실 속에 사안(事案)의 경중(輕重)을 분별하는 역사의식의 결여로 방향 감각을 잃은 건 아닐는지. 교육부의 이 결정이 궁극적으로 국격의 저하와 국익의 손실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