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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83] ‘성서조선’ 사건발발-일제경찰, 김교신 체포해 서울로압송

안티고네 2010. 3. 30. 07:08
[그때 오늘] ‘성서조선’ 사건 발발 … 일제경찰, 김교신 체포해 서울로 압송

 

 

‘성서조선’ 창간 동인 6명. 1927년 2월 촬영한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류석동·정상훈·김교신·송두용. 동인지로 시작된 ‘성서조선’은 16호부터 김교신이 주필을 맡아 단독으로 출간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1934년부터 19회에 걸쳐 이 잡지에 연재됐던 글이다.(출처:『김교신전집』, 부키, 2001년)
1942년 3월 30일 아침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김교신(金敎臣·1901~45)은 출근길이었다. 순사 한 명이 다가와 서울로 동행하자면서 수갑을 채웠다. 김교신은 수갑을 찬 채 순사 앞에 서서 개성역까지 걸어갔고 기차 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한 다음 다시 걸어서 경기도 경찰부로 향했다. 거리에서 마주친 지인과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927년부터 월간 ‘성서조선’을 간행하던 김교신은 1942년 3월호(158호)에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弔蝸)’이란 글을 실었다. 서울의 양정·경기고보를 거쳐 개성의 송도고보에 근무하던 김교신은 새벽이면 송악산 골짜기로 들어가 기도했다. 골짜기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김교신이 몸을 씻고 찬송을 부르면 개구리들이 반기기라도 하듯 몰려들었다. 추운 겨울이 되자 못이 얼어붙고 개구리들도 자취를 감췄다. 이윽고 봄이 돌아와 얼음이 풀렸다. 하지만 못에는 죽은 개구리들이 떠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못 밑에 아직도 개구리 몇 마리가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그래서 글은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는 탄성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글로서, 김교신은 이 못에서 무서운 시련에도 살아남아 다시 웅비할 민족의 앞날을 내다봤다. 이 사건으로 잡지는 폐간되고 전국의 독자 300여 명이 일제히 검거됐다. 훗날 부산복음병원을 설립한 의사 장기려처럼 10일 만에 풀려난 독자도 있었지만 김교신·함석헌·송두용·류달영 등 13명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만 1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29일 밤 출옥했다. 취조에 나선 일본 경찰은 말했다. “너희 놈들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중 가장 악질들이다.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 100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터전을 마련해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다.

교회사학자 민경배(연세대)는 말한다. “민족교회사를 공부할수록 그 주류와 명맥은 김교신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깊어가고, 그의 인품과 신앙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의 모습, 나라 사랑의 길이라는 생각이 더해 간다.” 지리학자이기도 했던 김교신은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에서 동양의 고난이 이 땅에 집중된 것은 한반도가 동양의 중심임을 증명하며, 따라서 동양의 가장 고귀한 사상 또한 한국에서 나올 것이라고 설파했다.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몸집만 큰 철부지’가 돼 버린 이 땅의 기독교를 보고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 선비’ 김교신은 뭐라 꾸짖을지 궁금하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http://news.joins.com/article/521/4085521.html?ctg=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