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 선생

<노평구전집>민족의 자각

안티고네 2002. 4. 9. 16:40

이번 대통령 후보 조병옥 씨의 급작스러운 서거는 온 국민의 비통을 자아냈다. 나 자신도 꼬박 하룻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 이 비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민족의 불우한 정치적 상황 및 죽은 조병옥 씨의 정치적 역량과 인물 됨됨이에 관련되는 것이지만, 좀더 깊은 의미에서 국민의 이 심각한 비통은 의식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인물이 없다는 직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인물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토록 인물이 빈곤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6.25 사변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실로 유대인의 바빌론 포수에 필적하는 비극이었다. 그것도 동족상잔으로 빚어진 비극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인물난의 더욱 중대한 원인을, 8.15 해방 후 식민지 시대 일본인들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 수많은 인물들을 동족의 손으로 다 죽여 버린 데서 구하고자 한다.

시인 단테는 자민족에 대해 저지른 죄악을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두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물난은 우리 민족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직감하게 된다. 실로 두려운 일이다. 나의 눈앞에는 우리 민족의 멸망의 환상마저 어른거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사에는 언제나 가혹한 시련 이상의 깊은 의도가 있는 것을 깨달아 이 인간적인 절망을 극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적은 주시지 않고 연거푸 이런 타격만을 가하시는 것은 역시 우리의 깊은 정신적 자각과 도덕적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인 것이다. 나는 민족의 일원으로서 이 현실에서 이를 절실하게 느낀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인물 정치, 더욱이 영웅 정치는 아니다. 정치에 대한 기대 또는 인물에 대한 기대 때문에 망연히 수수방관한 채, 정신적 도덕적인 반성과 자각 없이 나무에서 과일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국민은 민주주의의 과일을 먹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이른바 인물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진정한 자각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리와 독립> 제3호 (1960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