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저널> 2008년 8월호-박상익의 역사읽기: 막스 베버의 ‘아버지 살해’
막스 베버의 ‘아버지 살해’
김덕영 지음,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사상사, 2008), 376쪽, 13,000원
우리에게 막스 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쓴 탁월한 종교사회학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 김덕영은 막스 베버를 19세기 독일의 국가주의․권위주의․관료주의에 맞서 싸운 저항적 지식인으로 파악하면서, 바람직한 지식인과 대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제목 그대로 우리 사회와 우리 대학을 향해 “이 사람을 보라, 그리고 그에게 배우라!”고 외치는 것이다.
‘지각한 국가’ 독일의 대학과 교육
페르디난트 퇴니스(1855-1936), 게오르그 짐멜(1858-1918)과 더불어 현대 독일 사회학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막스 베버가 활동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 사회는 격변을 겪고 있었다. 일찍이 18세기 후반에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과는 달리, 독일의 산업화는 한참 늦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독일의 시민계층은 성숙하지 못한 채 귀족계급을 모방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그 결과 독일의 산업화는 영국과는 달리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오랫동안 수많은 지방 국가와 자유 도시들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1871년에 이르러서야 서유럽 국가들 중 마지막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흔히 독일을 ‘지각한 국가’라고 부른다. 독일의 통일 역시 산업화와 마찬가지로 시민계층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귀족계급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독일 통일의 중심에는 토지귀족인 융커(Junker)가 있었고, 융커의 중심에는 비스마르크(1815-1898)가 있었다.
독일은 경제적 발전(산업화)과 정치적 발전(통일)을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새로이 창건된 독일제국에서 정치적․군사적인 패권을 쥔 것은 봉건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인과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학문과 전통을 고수했던 그들은 근대적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문화자본을 축적할 수 없었다. 지식인들은 국가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인 독일제국의 지배체제를 정당화했다. 대학은 유대인과 사회주의자에게 교수직을 불허하는 등 지극히 폐쇄적이었다.
알트호프 시스템을 비판하다
막스 베버는 1889년과 1891년 베를린대학에서 ‘법학’ 전공으로 박사학위와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독일에서 교수가 되기 위한 자격―을 취득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사강사 및 부교수로서 로마법, 독일법, 상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베버는 1894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독일 대학 세계에서 불과 30세의 나이에 정교수가 된다는 것도 놀랍지만, 법학을 전공한 학자가 경제학 교수로 초빙된 것은 우리의 시각에서 더더욱 납득하기 힘들다. 그러나 베버는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정도로 촉망받는 학자였다. 베버는 법학을 전공하면서도 박사학위 취득 전인 1888년부터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사회정책학회’에 참여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그 연구 활동의 성과를 인정받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교수로 초빙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베버의 학문적 역량은 모교인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레빈 골드슈미트의 후임으로 물망에 오를 정도도 탁월한 것이었다. 골드슈미트는 19세기 독일 상법을 이끈 거두로서, 그의 후임이 된다는 것은 학자로서 대단한 명예가 아닐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베버가 모교인 베를린대학 정교수 자리를 버리고 프라이부르크대학으로 옮겨간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베버가 베를린대학을 마다하고 프라이부르크대학으로 간 이유는 프리드리히 알트호프(1839-1908)라는 독재적인 인간의 영향력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알트호프는 독일의 교육부 관리로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독일제국의 대학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알트호프는 내심 베버를 골드슈미트교수의 후임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베버는 베를린대학은 물론 다른 어느 대학에도 묶여있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그러자 알트호프는 베버가 학자로서 장래가 촉망되기 때문에 프라이부르크를 그저 단순한 ‘도약대’로만 이용할 것이라고 악선전을 하는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베버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베버는 알트호프가, 마치 비스마르크와도 같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인간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베버에게만 가해진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저자 김덕영은 이 사건이 베버의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독일 학자들이 겪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지적한다. 독일의 대학정책은 국가와 관료가 교육과 대학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이른바 ‘알트호프 시스템’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베버는 알트호프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알트호프는 비스마르크와 매유 유사했다. 비스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알트호프는 독일의 국가주의와 관료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알트호프 시스템에 대한 베버의 비판은 단순히 교육과 대학에 대한 비판으로 그치지 않았다. 알트호프 시스템은 독일 사회의 점증하는 권위주의화․관료제화 과정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생애는 독일제국의 역사(1871-1918)와 거의 일치한다. 베버와 그가 속한 시민 계층은 정치적으로 독일제국과 비스마르크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독일제국과 비스마르크가 구축한 국가와 사회에서 태어났으며, 그 기반 위에서 자라났고 활동했기 때문이다. 독일제국의 아들인 시민계층은 자신을 ‘아버지’인 귀족계급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독자적 사회집단으로 발전해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스스로 봉건화․귀족화 되어가고 있었다.
베버는 비스마르크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적이었다. 물론 독일 통일의 업적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서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독일에서는 시민계층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족세력이 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베버는 인정했다. 국가의 통일은 아버지의 업적이므로 아들은 이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미는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만약 무대에 계속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지금까지의 공로도 퇴색하고 말 것이었다. 이제 아들이 역사의 무대에 설 차례였고, 그 아들은 다름 아닌 시민계층이었다. 독일 역사가 종말을 고하지 않으려면 국민국가를 창건한 귀족계급 즉 ‘아버지’를 살해하고 정치적으로 미숙한 시민계층, 즉 아들을 정치적으로 교육시키는 것밖에 대안이 없었다.
베버는 정치참여가 아닌 학문적 작업을 통해 정치적 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대표 저서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근대 시민계층의 직업윤리를 문화사적으로 추적한 배경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70년대식 낡은 개발 논리가 여전히 ‘아버지’로 군림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아버지 살해자’ 막스 베버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